짝퉁의
추억
- <살인의 추억>에 부쳐
2003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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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추억>
이 영화 재밌고 잘만든건 이미 거의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진 사항인 것 같으니, 구질구질 주절주절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지는 않겠다. 그래도 한마디만 하자면, 본인은 이 영화를 1시 30분에 저녁 8시 표를 사서 6시간 반 동안 극장 주변에서 '재미없기만 해봐라..'를 중얼거리며 굶주린 하이에나 마냥 극장 주변을 배회했더랬었는데, 그 방황의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더랬다. 그만큼 재밌다는 얘기다.
어차피 대부분 보실 계획잡고 계시겠지만, 남들 다 보는거 나까지 따라 보기는 싫다는 안따라주의의 신조를 지키며 비디오 출시를 기다리시는 분들 마저도, 웬만하면 극장가서 봐주시기 바란다. 이 영화보고 돈 아까우면 내가 환불해주...지는 않지만, 여튼 손해볼꺼 하나도 없음이다.
헌데 이 영화의 장면들 가운데, 유독 본인의 집중력을 강렬하게 자극하는 한 장면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나이스NICE' 등장 장면이다.
과연 NICE란 무엇이던가.. 이는 바로, 아디도스ADIDOS, 프로 스포츠PRO-SPORTS와 함께 트로이카를 형성하며 한국 짝퉁史의 태동기를 열어제낀 짝퉁계의 큰 원류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그렇다.
아마도 그 NICE 장면에서 수많은 남성 관객들은, 실내화에 매직으로 나이키 로고나 아식스 로고를 아로새겨 넣으며, 실내화 입에 물고 한시간 동안 복도에 서 있는 등의 탄압에도 결코 굴하지 않았던 소시적의 기개를 떠올리며 아련한 노스탤지어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 사료된다.
1. 짝퉁의 전성기, 그 최고의 걸작그러한 쟁쟁한 짝퉁의 역사는, 비단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러한 트로이카 짝퉁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NICE가 출시되던 그 당시, 나름대로 메인스트림에 진입하며 발군의 성과를 올렸던 또 하나의 나이키 짝퉁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페가수스'라는 메이카('브랜드'가 아니라 '메이카'가 정확한 용어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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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가수스'는 약 5일간 굶은 듯 홀쭉해진 나이키 로고의 꼬리가 다소 비굴한 상향 각도로 꺾여 올라간 형태를 취하고 있던 메이카로서, NICE와 같이 다소의 쪽팔림을 유발할만큼 맹목적으로 상표명까지 따라하지는 않아, 당시 저예산 메이카 선호집단에 의해서 폭넓게 받아들여졌던, 나름대로의 절제미를 갖춘 짝퉁 메이카였다.
그러한 본격파 짝퉁 메이카 중, 짝퉁의 3대 요소인 (1) 유사성 (2) 독창성 (3) 골계미 그리고 (4) 논리적 개연성의 모든 면에서 공히 한국 짝퉁계의 축적된 역량을 한몸에 집약시켜 형상화 해내고 있는 舊 짝퉁계 최고의 걸작은 바로,
'아놀드 파라솔 Arnold Paraso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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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놀드 파라솔'. 당시, 변형의 여지가 상당히 많은 로고 때문에, 짝퉁계에 엄청난 영감을 제공했던 비운의 브랜드 '아놀드 파머Arnold Palmer'... 아놀드 파머의 짝퉁은 대부분 손쉽게 가공/변형할 수 있는 로고에 집중되었던 바, 대부분의 짝퉁 메이커들은 우산의 색의 순서를 바꾼다던지, 우산의 기울어진 각도를 반대로 한다던지, 아니면, 우산 끝을 구부려버린다던지 하는 매우 진부하고도 소극적인 짝퉁화 기법을 취하였다.
즉, 당시의 짝퉁계는 우산에 비해 절대적으로 공략의 난이도가 높았던 아놀드 파머의 필기체 로고는 아예 짝퉁화의 대상에서 제외시켜 삭제해버리거나, '엄브렐러Umbrella'등의 유사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로고를 갖다붙이는 등의 한계를 노출하고 있었다. 결국 이 '아놀드 파머' 필기체 로고의 짝퉁화는, 당시 짝퉁계로서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암묵적인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이러한 범 짝퉁계적 한계를 단번에 극복하며, Palmer를 Parasol로 바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의해 고도의 유사성, 독창성, 골계미를 확보하며, 심지어는 우산과 파라솔을 연계시키는 논리적인 개연성마저도 완벽하게 구현해 낸 짝퉁 메이카의 기린아, 그것이 바로 '아놀드 파라솔'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놀드 파라솔'은 이미 짝퉁화가 진행될대로 되어 오리지널인 '아놀드 파머'마저도 그 브랜드적 약발이 다소 저하되기 시작한 시점에 뒤늦게 등장하여, 대중적 호응을 끌어내는데는 실패하면서 저주받는 걸작으로 머무르게 된다.
2. 짝퉁계 최후의 걸작이러한 본격파 짝퉁들과는 달리, 나름대로 독자적인 이름과 로고를 갖추며 페가수수 등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던 저예산 부동층 흡수에 힘썼던 메이카들 또한 우리의 주목을 끄니, 이들에는 그 이름도 정겨운 '까발로Cavallo'와 '타이거Tiger', 그리고 '슈퍼 카미트Super Comet'등이 있다.
이들 중, 그 이름부터 결코 범상치 않았던 까발로는 아직까지도 청량리, 영등포 등지의 서울 외곽 지역 지하상가 등에서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 최근 필자에 의해 직접 목격된 바, 그 장구한 세월을 이겨낸 강력한 생명력은 저예산 메이카계의 귀감이 되고 있다.
어쨌든, 이렇게 드넓은 범위를 포괄하고 있는 한국 짝퉁계의 전통은 현재, 일말의 창작의 고뇌마저도 엿보이지 않는 복제인 명품 모조품 제작으로 변질되면서 과거의 낭만과 멋을 완전히 잃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류적 흐름에 저항하며 아직도 음지에서 꿋꿋이 과거 짝퉁계의 전통과 명맥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보이고 있는 바, 그 중 최근 본인이 목격한 메이카 중 최고의 유사성, 독창성, 논리적 합리성 그리고 골계미를 갖추고 있는 걸작 짝퉁 메이카를 소개하고자 한다.
아놀드 파머와 마찬가지로 이미 수많은 짝퉁 메이카들에게 영감을 선사하며 오랜기간 짝퉁화의 대상이 되었던 비운의 걸작 브랜드인 미치코 런던MICHIKO LONDON.. 이 미치코 런던은 '폴로Polo'와 함께 처음으로, 짝퉁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채 그냥 완전 똑같이 베껴버리는 '본격 모조품 제작'의 대상이 되었던 브랜드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짝퉁은 이미 그 짝퉁적 독창성과 낭만을 상실하며, 완전 모조품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비극적인 역사의 출발점에 있었던 미치코 런던은 오랜 모조품화를 거치면서, 브랜드적 약발을 상당부분 상실하였고, 그 뒤 이 브랜드의 모조품화는 완전히 중단된 듯 보였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이러한 미치코 런던의 아픈 역사에 대한 헌사를 바치며 이미 완전 모조품에 의해 유린된 짝퉁계의 전통을 일시에 복원하려는 듯한 로고가 등장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짝퉁계의 마지막 걸작, '미시간 런던MICHIGAN LONDON'이다.
오오.. 짝퉁계 최후의 걸작이 보여주는 저 웅대한 위용..
오로지, 알파벳 세 글자에서만 차이점만을 보여주며(michiCO : michiGAN), 그나마 C와 대응하는 알파벳인 G는 오리지널과 거의 그 모양에서 차이를 보이지 않는 고도의 유사성을 보라. 또한, 단순한 유사성에만 머무르지 않고, 미시간과 런던이라는 두 지명을 나란히 연결시키며 고도의 논리적 개연성마저도 확보하고 있는 걸작 짝퉁 '미시간 런던'..
아, 이 짝퉁 메이카는, 심지어는 한글로 써놓아도 그 유사성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 치밀함마저 보여주고 있지 아니한가..
3. 그러나...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우리는 과거의 짝퉁들은 오리지널을 토대로 나름대로의 해석과 독창성을 가미하여 자신들만의 고유한 세계를 구축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짝퉁적 독창성은 모두 배제한 채, 외제 명품을 맹목적으로 가져다 정교하게 복제하는 기술만이 발달하고 있는,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져버린 작금의 짝퉁계.. 변두리 시장바닥에서 우리를 환호시키던 짝퉁의 낭만과 멋은 이미 잊혀진 옛것이 된 지 오래이다.
오히려, 언더그라운드의 전유물이라고 생각되었던 이러한 짝퉁계의 전통은, 제도권의 멀쩡한 넘들에 의해 폭넓게 수용되고 확산되었던 바, 아직까지도 그 위세를 유감없이 떨치고 있는 각종 표절과 도작, 무단모작 등은 바로 이러한 언더그라운드 짝퉁계의 소박한 전통을 제도권이 전문화/기업화시킴으로써 왜곡한 대표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비단, 가요 표절이나 TV 프로 표절, 각종 디자인 표절 등의 경우 뿐만이 아니다. 얼마전까지 필자가 TV를 통해 연재했던 <결정적 장면>의 경우만 해도, 영화 <광복절 특사>의 예고편을 필두로, 롯데리아 광고, 오징어 땅콩 광고, 최근에는 하이마트 광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멀쩡해보이는 집단들에 의해 이미 짝퉁화되지 않았던가...
그렇다. <살인의 추억>에서 살인이 단지 추억으로만 남아있지 않았듯, 짝퉁의 추억 역시 단순한 추억으로만 남아있지 않다.
그것은, 콘크리트 뚜껑에 덮여있을 뿐인 '살인의 추억처럼, 오히려 더욱 정돈된 멀쩡한 모습으로 업그레이드 되어 우리의 '현재'로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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