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 무비 개혁을 위한 일 제언
- <허드서커 대리인>을 중심으로 -
2002 12. 27
지난해 연말 nkino의 청탁으로 썼던 글. 초여름에 연말연시 얘기를 올리려니, 마치 호주에서 크리스마스를 맞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 기분이 어떤거냐고? .. 안해봐서 모른다.
올해에도 왔다. 올해 크리스마스에도 잊지 않고 <벤허>가 찾아왔다..
<나홀로 집에> 등의 신진세력에 밀려 잠시 주춤했던 클래시컬 크리스마스 TV 무비가, 오랜만에 재 등장한 <벤허>를 필두로 약진하는 가운데, 또다시 숨가쁘게 신정 특선 푸로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근데, 아무리 지겨우니어쩌니해도 성룡 영화 한 편 때려주는 데 없으면 웬지 해가 넘어가도 별로 넘어가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지는 것이 인지상정인 듯 하다. 반복학습으로 형성된 조건반사적 행동양식을 증명하는 사례가 꼭 ‘파블로프의 개’ 뿐인것만은 아니다. 어쨌든.
그 길지도 않은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영원히 건물 사이를 날라댕길 것만 같던 성룡 마저, 과거와는 사뭇 달리 상당히 노쇠한 액션을 보여줌으로써 많은 명절무비 팬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허나, 안타까움이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늦추어주는 것은 아닐 터.. 그렇다. 그러한 우리에겐 성룡과 터미네이터, 그리고 다이하드를 뛰어넘는 새로운 명절무비 레파토리들을 발굴 욱성해내어, 명절무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야만 할 전환기적 사명이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명절무비의 기초 조건으로
1. (성룡, 아놀드 등) 특정 인물에 의존하지 않는다
2. (홍콩 등) 특정 지역에 편중하지 않는다
3. (액션, SF 등) 특정 장르에 얽매이지 않는다
4. (TV에서 덜 노출되어) 참신성이 있어야한다등의 항목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며, 필자는 위의 기초 조건을 충족시키는 영화들 중에서, 연말연시에 빌려다 볼만한 영양가를 함유한 영화로 코엔 형제가 감독한 <허드서커 대리인The Hudsucker Proxy>을 선정한다.
오프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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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 영화는 인트로부터 연말연시 무비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웬만한 단맛쓴맛 다봐서 이제는 뭐가 됐든 저만치쯤에 내려다보인다는 듯한 걸쭉한 목소리의 흑인 아저씨의 목소리로 읊어지는 나레이션, 그리고 잔잔히 깔리는 따뜻한 음악과 눈 내리는 도시의 밤하늘... 이런 요소들이 모두 짬뽕되어 있는 이 영화의 인트로는, 말하자면 성인용 구연동화 같은 필로, 은근히 듣는 사람을 얘기속으로 빨아들이는 구석이 있다.
이러한 흡인력 있는 인트로는 연말연시 무비로서 매우 핵심적인 요소인 즉,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연말연시 무비의 관객층은 ‘휴일 잉여시간 처리 미숙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바, 이들은 연인들이 다수 몰리는 극장 등의 장소를 기피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다. 해서 이들은 인근 비디오 샵이나 TV 상영 영화를 통해 영화 관람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해당 영화의 첫 부분이 일단 괜찮으면 웬만하면 정 붙여서 그냥 끝까지 봐주려는 현실 안주형 관람행태가 이들에게서 지배적으로 관찰된다.
따라서 연말연시 무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잉여시간을 처리하지 못해서 부득이하게 집에서 영화나 보게 됐다’라는 부정적이고 암담한 이미지가 아닌, ‘멋진 인트로에 이끌려서 나도 모르게 영화를 끝까지 보게 되었다’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관람자가 관람자 스스로를 설득시킬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허드서커 대리인>은 이러한 자기 암시의 소스로서 훌륭하게 기능할 수 있는 인트로를 보여주고 있고, 그러한 면에서 이 영화는 연말연시 무비에 적합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 할 수 있다.
또한, <허드서커 대리인>은 인트로 이후 전개되는 영화의 내용에서도 이 영화는 집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층의 마음을 덥혀주기에 충분하다고 판단된다. 즉, 이 영화가 보여주는 거대회사의 높은 양반들의 협잡질과 그로 인한 주인공의 좌절과 재기, 그리고 그 와중에 벌어지는 러브 스토리는 상당히 단순한 것 같지만, 나름대로 꽤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러브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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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음악과 함께 갑자기 고조되는 이들의 키스 장면으로 어두운 조명의 실루엣으로 처리됨으로써 영화는 최대한 염장 필을 억제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장면은 연말연시 무비의 러브씬으로서 갖춰야 할 절제의 미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며,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잉여시간 처리 미숙자들을 위한 코엔 형제의 사려깊은 배려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이 영화의 러브 스토리는 나름대로 상당히 터프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어, 과도한 느끼함이나 다정함을 보유함으로 인해 집에서 평화롭게 비디오나 TV를 즐기며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연말연시 무비 관객들의 염장을 본의 아니게 지르게 되는 부작용을 최소화시키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헐리우드 주류와는 사뭇 다른 필의 영화를 만들어 온 코엔 형제의 따뜻한 배려를 느끼게하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동영상 2 [키스씬] 57:22 “내 생각엔 아마도..” ~ 59:29) 하지만, 러브 스토리에서 어느 정도의 염장은 불가피 한 것. 연말연시 무비의 러브 스토리의 성패는 이러한 염장성을 얼마나 최소화 하면서 따끈한 사랑의 감정을 전달하는가에 있다 하겠다.
일단, 위 동영상에서 보시다시피 이 영화의 핵심 키스씬인, 주인공 ‘노빌 반스(팀 로빈스 분)’와 여주인공 ‘에이미 아처(제니퍼 제이슨 리 분)’가 파티장 발코니에서 첫 키스를 하는 장면은 상당히 염장스럽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는 인트로에서 깔렸던 그 음악이 다시 한 번 첫 키스의 감정을 멋들어지게 표현하고 있다.
잉여시간 처리 미숙자들을 위한 감독의 배려는 실로 눈물겹다 특히, 키스 전 워밍업 장면에서 노빌 반스가 에이미 아처에게 전생에 대해서 읊조리는 대사는, 나중에 작업 도중 결정적인 순간에 한 번 써먹어봄직한 대사의 전형을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에게 실용적인 도움까지도 주고 있다.
그런데.. "전생에 너와 나는 뭐였을까.. 우리는 들판을 노니는 한 마리 영양이었을꺼야..“ 등등의 대사를 일상생활에서 여과나 수정 없이 응용했다가는, 오히려 복구불능의 심대한 타격을 입을 수도 있으니 각별한 주의를 하시기들 바라고.. 어쨌든, 마지막 장면으로 넘어가도록 하자.
엔딩
44층 건물에서 뛰어내리기 직전의 주인공의 암울무쌍한 모습에서 시작한 이 영화.. 그러나 이 영화는, 인트로의 암울한 필에 부합하지 않는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된다.
보신바와 같이, 팀 로빈스의 실로 멋들어진 원반 던지기와 함께 말이다. 그의 이 빨간 원반 던지기 동작은 비록 유명한 동작은 아니지만, <쇼생크 탈출>에서 그가 보여줬던 ‘비내리는 하늘 향해 두 팔 들기’ 동작에 필적할 만큼 멋진 동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이 영화의 엔딩에서는 인트로에서의 구수하게 나레이션을 깔아줬던 그 흑인 아저씨의 음성이 또 한 번 깔림으로써, 수미쌍관의 묘를 살려주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영화 끝나기 2분전까지 좋았다더라도 마무리가 찝찝하면 명절무비로서는 중대한 결격사유가 된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또한, 할머니할아버지엄마아빠언니오빠동생강아지 모두 한데모여 끌어안으며 닭똥같은 감동의 눈물 흘리는, 꿈과 희망이 파노라마치는 진부해터진 엔딩 또한 관객들로 하여금 괜히 바보 된듯한 자괴감을 들게 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 또한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팀 로빈스의 우아한 동작과 그 목소리만으로도 다 잘 될 것 같다고 얘기하는 듯한 이 나레이션, 그리고 음악. 이들이 만들어내는 삼박자는, 새해에 뭔가 좋을 일이 생길 것 같은 희망적인 느낌을 주면서 너무 바보같지는 말아야 한다는 연말연시 무비의 요건에 십분 부합하는 엔딩을 만들어내는데 큰 공헌을 하고 있다.결론
지금까지 이 영화의 엑기스라고 할 수 있는 인트로, 중간 키스씬, 그리고 엔딩을 살펴보셨다. 이 세 장면에서 느끼신 바대로 <허드서커 대리인>은, 크리스마스에 이은 새해 맞이라는 원투 스트레이트 명절 분위기의 집중포화를 받아 좌절의 도가니탕에 빠진, 수많은 잉여 시간 처리 미숙자들의 외롭고도 권태로운 마음을 달래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영화이다.
명절 기간이면 더욱더 춥고 배고파지기만 하는 각계각층 관객들의 마음을 따끈하게 덥혀주는 이러한 기능성이야말로 연말연시 명절무비 본연의 임무인 바, <허드서커 대리인>은 충분히 그 중 하나로 선정될 가치가 있다 할 것이다.
그렇다. 이제 단순히 인맥, 지연, 학연...은 아니고, 하여튼 관객의 심중을 외면한 구시대적 선정기준을 통해, 옛날에 했던 그 명절무비를 조건반사적으로 반복하여 선정하는 시대에는 단호히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여기에서 제시된 <허드서커 대리인>은 그러한 영화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 것인 바, 앞으로 관객들과 업계 종사자들의 노력에 의해 참신하고도 훌륭한 명절 무비들이 많이 발굴되었으면 하는 것이 이 글의 작은 소망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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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쪼록, 2003년 한해는 노빌 반즈의 저 원반 던지기처럼 생각하는 일들이 시원시원하고 유쾌하게 풀려가는 한 해가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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