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빠와 갑빠 무비 (1)
2003 05. 18
1. 갑빠란 무엇인가
갑 빠..
바짝 날이 선 흰색 와이셔츠 깃 아래로 풀어진 단추구멍 사이, 반짝이는 땀방울 밴 가슴털을 슬며시 노출시키며, 부릅뜬 도끼눈 사이로 강렬한 미소 한 번 날려주었던 수많은 배우들의 면면과, 그들이 우리들 가슴속에 남겼던 기라성같은 족적을 일순간에 살아 숨쉬게 하는 그 한 마디,
갑빠...
30년이 넘는 세월에도 그의 갑빠는 결코 녹슬지 않는다 멀리는 이소룡부터 가깝게는 아라곤/레골라스까지, 갑빠야말로 거의 영화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시간 동안 영화계를 지탱해온 거대한 동력이었다는 것을, 감히 부인할 수 있는 자는 없으리라..
허나, 갑빠는 지금까지 하나의 독립된 개념으로 정립되지 못하고 ‘액션’, ‘터프’, ‘야성미’, ‘남성미’, ‘남성적 체취’ 등의 모호하고도 부적절한 단어들로 대체됨로써, 안타까움을 자아내었더랬다.
그렇다. 우리가 갑빠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진, 그것은 아직 갑빠일 수가 없는 것이 아니던가.. 따라서, 갑빠의 명확한 정의와 분류는, 영화계에서 실로 다양한 형태로 광범위하게 분산되어있는 갑빠 무비들을 하나로 묶어내기 위한 작업의 첫번째 과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우리는, 갑빠의 정의를 내리는 것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도록 하겠다.
갑빠의 정의
'갑빠'는 ‘특정 영화 캐릭터의 내면세계에 응집된 내공의, 적극적이고 절제된 외적 표출’이다.
자, 위의 정의에 대해 좀 더 상세히 논해보도록 하자.
위 정의에서 ‘내면세계에 응집된 내공’이라 함은, 굳이 3개 대륙을 아우르는 대하 역사 드라마스러운 장대찬연한 스케일에서 나오거나, 또는 몇 달만 지나면 공중부양을 할듯한 심오찬란한 내면세계에서 만들어진 내공만을 일컽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첩혈쌍웅>의 주윤발이나 <터미네이터>의 아놀드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갑빠는,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5초 미만의 시간에 이해되는 짤막 단순 명쾌한 세계관을 소유한 캐릭터들에서 더욱 강렬하게 나타나고 있다.
상이한 국적과 자세에도 불구하고, '상의 단추 풀어 제끼기'라는 갑빠맨 공통의 의상 착용법을 취하고 있는 두 갑빠계의 거두 따라서, 특정 캐릭터가 내공이 응집된 내면세계를 구축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자질은, 심원한 정신세계라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단순한 세계관에 웬만해서는 회의를 품지 않는 강인함과, 그것을 부단한 반복을 통해 관객에게 주입시키고 동화시켜 내고야 마는 집요함이라 할 것이다.
이제, 정의의 뒷부분을 살펴보도록 하자. ‘적극적이고 절제된 외적 표출’이라는 부분에서, ‘적극적’과 ‘절제된’이라는 상반된 단어들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는, 실로 예리한 독자들이 있을줄로 안다.
바로 이 부분이 일반인들에 의해 흔히 혼동되기 쉬운 부분인데, 이에 대한 명확한 이해 없이는, 진정한 갑빠 무비의 옥석을 구별해내지 못할 위험이 발생하므로 독자 여러분의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하겠다.
자, 그렇다면 이제, 이 대목에 대해 상세히 논하도록 하자.
여기에서 ‘적극적’이라 함은 영화가 갑빠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이며, ‘절제된’이라고 하는 부분은 갑빠 캐릭터 자신이 자신의 내공을 표출하는 방법을 일컫는다.
다시 말하면, 영화는 슬로우 모션, 클로우즈업, 60db 이상의 효과음 등 각종 기법들을 통해 적극적으로(때로는 오바까지 불사하며) 갑빠 캐릭터의 내공 표출을 강조해주어야 하고, 반면에 갑빠 캐릭터 자신은 최대한 정제되고 억제된 필로 자신의 강렬한 내공을 함축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갑빠 무비들은 거의 예외없이 이러한 적극성과 절제미를 절묘하게 조화시켜낸 갑빠 장면들을 보여주고 있는 바, 이러한 영화들은 영화도 배우도 너나 할 것 없이 오바를 해버리고 마는 유사 갑빠 무비들과 엄격히 구분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오바와 절제를 이상적으로 조화시켜, 새로운 갑빠의 지평을 개척한 주성치 대인 오늘은 몸풀기로 갑빠의 정의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다음회에는 갑빠 캐릭터의 종류와 그 세부 분류법에 대해서 논하도록 하겠다.
(계속)
[보론] ‘갑빠’의 일본어 기원설에 관하여
갑빠는 제도권에 의해 특수 전문용어(속칭 ‘비속어’)로 분류되는 단어인 바, 이 단어가 정규적인 단어로서 사용될 수 없는 타당한 이유가 있는지 여부를 살펴보는 것은, 갑빠와 갑빠 무비의 위상정립에 필수적인 일이라 할 것이다. 해서, 본 연구에서는 갑빠의 어원에 있어 가장 설득력있게 제기되는 이론인 ‘일본어 기원설’에 대해 짤막한 고찰을 행하도록 한다.
이 학설은 ‘갑빠’의 음운학적 특성으로 인해, 이 단어가 웬지 일본영화에서 많이 들어본 단어인듯한 인상을 주는데서 비롯된 학설이라 사료되는데, 이 학설은 일반인들뿐만이 아니라 특수 전문용어(세칭 ‘은어, 속어, 비속어’) 사용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해서, 평소 ‘쓰레빠’ ‘란닝구’ ‘비니루’ ‘와루바시’ 등의 기초 생활 일어의 세계에서 웬만하면 벗어나지 않는 필자는, 이 학설의 진위를 규명하기 위해, 두려움을 떨치고 분연히 일어나, 일한 사전을 펼쳐들었다.
그 검색 결과, 필자는 갑빠와 가장 근접해있다고 판단되는 다음 단어를 발견할 수 있었다.
カッパ kappa (명) 가빠. ①소매없는 비옷. = あまカッパ. ②짐, 가마 따위에 비막이로 덮는 동유지(桐油紙). ▷포 capa. 위에 따르면 일본어 갑빠(カッパ)는, 한마디로 말해서 ‘비 가리개’인 바, <블레이드 러너>의 마지막 장면이나 <반지의 제왕 - 두개의 탑> 전투씬 등의 예에서 볼 수 있듯 갑빠 장면이 우천시에 많이 촬영된다는 것 이외에는 큰 공통점이 없어, 일본어 기원설은 그 근거가 희박한 이론으로 판명되었다.
그런데, 일본어 기원설이 근거없는 학설이라면, ‘갑빠’라는 단어는 과연 어디에서 유래한 것이더란 말이던가.. 그 신비의 연원을 찾아가는 길 또한 매우 의미있는 일이겠으나, 지면관계상 차후의 과업으로 잠시 미뤄두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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