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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book
한동원의 글 수첩


<에일리언 2> 유감

2003 6. 12




제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에일리언> 시리즈 DVD가 도착했다.

세상에 기쁜 순간들이야 많다지만, 벌써 배달돼서 나의 뜯음을 기다리고 있던 CD나 DVD 포장을 뜯을때 만큼의 기쁜 순간은 그렇게 흔하지 않다. 길거리에서 빳빳한 천원짜리 지폐 주웠을때의 기쁨과 비슷하달까. 여튼 그건, 실로 가슴살 떨려오는 기쁨인거다.

게다가 이번에는 이런저런 우여곡절과 꽤나 긴 기다림 끝에 사게 된 DVD라 더더욱 그랬다. 또, 박스 안 포장지로 들어있던 뽁뽁이(속세명칭 : 에어캡) 터뜨리는 쾌감까지 덤으로 있었다. 물론 나는 <아멜리에>의 그 녹음기 변태맨처럼 좀시럽게 하나씩 터뜨리지는 않는다. '움켜쥔다' 기법으로 한큐에 왕창 터뜨린단 말이다. ...근데 내가 왜 이런 구차한 변명을 하고 있는거지..

여튼, 이렇게 주문한 DVD들(또는 CD)의 포장을 뜯고나면, 얘들 중 뭘 제일 먼저 틀어줄까..하는, 내돈 안내고 먹는 회전 초밥집에 온 것 같은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데, 이번에는 단연 <에일리언 2>가, <애니 매트릭스>마저도 제끼고 선두를 먹었다.

그리고 당연히도, <에일리언 2>는 결코 실망스럽지 않았다. 뭐, 원체가 가만 냅둬도 훌륭한 영화잖어.

게다가 얘는, 개봉 당시에는 없었던 장면들을 영화 곳곳에 살려두고 있어서 그 훌륭함을 더했다. '과연 스페셜 에디션이군'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 개나소나 다 붙이는 'SE'란 말은 바로 이럴때 쓰는 말이었던거다.

어쨌든, DVD에는 에일리언의 습격을 받기 전의 이주민 기지 장면이라던가, 그 시절 뉴트 가족의 모습이라던가, 에일리언 떼가 리플리 일행을 덮치기 전 환풍구에서 로봇 자동소총들이 최후의 저항을 하는 장면 같은 것들이 추가돼 있는데, 이 장면들이 나왔을때 나는, 십년전 읽지도 못하고 잃어버렸던 연애편지를 우연히 발견했을때와 비스무리한 감격마저 느꼈다. 그게 어떤거냐구? 나도 안해봐서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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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해야하나..

이 DVD에는 이런 기쁨에 완전히 찬물을 끼얹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자막 번역이었는데, 기본적으로 앞뒤 헷갈리게 하는 오역은 둘째 치고라도, <에일리언 2> 특유의 터프하고도 멋진 대사들을 압축 오징어 구이마냥 밋밋하게 뭉개놓은 자막은, 그야말로 경악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거다.

해병대 대원들이 대부분 에일리언에게 당한 뒤에, 장갑차를 몰고 들어가 나머지들을 구출해 나온 리플리가, 대기권 밖으로 나가서 행성 전체를 핵폭탄으로 쓸어버리자고 얘기하는 대목이 있다.


이 장면에서, 저 보글보글한 파마부터가 일단 야비하게 생겨먹은 회사측 사람 '버크'가 '이 시설이 얼마짜린지나 아냐'고 따지고 나선다.

이때, 리플리가 대답으로 날려주는 대사가 실로 멋진데, "나한테 청구서 보내라고 해요. They can bill me."가 바로 그것이다.

크아. 이런거야 말로 과연 리플리다운 저돌적 단호함이 아닌가.

하지만, 이 대사는 화면에서 보시다시피 "그래서 내가 온 거예요!"라는 정체불명의 문장으로 번역돼 있다. '저게 얼만지나 아냐?'에 대한 대답이 '그래서 내가 온거다!'라.. 조또, 뭔소리야.

시껍한 마음에 혹시, 뭐 근방에 있는 대사 번역이 잘못 끼어들어온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앞뒤를 뒤져봤지만, 물론 그런 대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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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가 나온김에, 하나 더 예를 들어보자.

두번째 예는 리플리 일행이 시설 설계도면을 보면서 방어선 구축계획을 세우는 장면인데, 뭐, 여기저기이리막고저리막고어쩌구저쩌구..하면서 작전세우는 대목은 대충 번역해도 어느 정도 용서가 된다.

하지만, 작전수립이 다 끝난 다음에 '힉스'가 은근한 미소와 함게 날리는 이 마무리 대사, 이 대사 만큼은 제대로 번역이 됐어야했다.

"훌륭해요.. 이제 어디서 카드 한 벌만 구해다 놓으면 되겠군요. Outstanding.. Now all we need is a deck of cards."

시시각각으로 에일리언들이 쳐들어오고 있는 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여유넘치는 미소와 함께 이런 대사를 날려주는 따스한 낙천성이야말로 힉스의 진면목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 대사는 앞의 작전 수립부분과 떡이 된채 "특이하군요. 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같소."라는 독창적인 대사로 리메이크 됐다. 게다가, 이 자막은 관객들에게 그 독창성을 각인시키려는 듯, 흘러흘러 넘어가는 장면은 아랑곳 않은 채, 오랫동안 굳건히 박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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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번역들이 삼천년 묵은 에일리언 알마냥 널리고 널렸지만, 고만 하련다.

어쨌든, 이 자막 번역에 있어서 가장 경이로운 점은, 이 영화가 벌써 이백년전에 비디오로 출시됐고, TV로도 수십번도 넘게 방영됐던 영화라는 점일 것이다. 설날에 TV에서 해주는거 냅다 녹화해놨다가, 그 더빙을 살짝 바꿔주기만 했어도 이렇게 심한 버전은 나오지 않았을꺼란 얘기다.

뭐, 우리나라 자막 번역 이런게 어디 하루이틀 일이냐구 하면 할 말 별로 없음이다. 하지만 자기네 영화 스틸 사진에 저작권 표시를 떡칠해놓고, 그나마 다운도 받기 어렵게 해놓고 자기네 영화 보호에 신경쓰는 미국 직배사에서 만든 DVD 타이틀 자막이 이모냥이꼴이라는 건, 역시나 심히 잡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다.

이건 한글 자막만을 선호하는 관객들에게 영문 자막 관람 또는 無자막 관람을 유도함으로써, 관객들의 영어실력 향상을 도모한 자상한 배려의 발로였을지도 모른다.

뭐, 그렇게라도 생각해야지 어쩌겠어.

이게 얼마주고 산건데.

끄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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