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만화 <닥터 스크루>
2003 7. 14
망토 한 장 어깨에 걸친채, 발밑으로 부는 먼지바람을 맞받으며 만화가게 문을 슬며시 열어제끼고, 이 만화방 최고의 고수와 겨뤄보고 싶소만...등의 대사를 읊조릴 정도로 만화를 많이 본 건 아니기 때문에 섣불리 '최고'를 논하기엔 좀 그렇다만,
어쨌든 지금까지 내가 봐 온 만화들 중 최고의 만화는 역시 <닥터 스크루>다.
물론, <마스터 키튼> <몬스터> <20세기 소년> 등등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들도 좋고, <아키라>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같은 초거대 전지구적 대하드라마도 압도적이지만, 그래도 필자는 역시 만화하면 <닥터 스크루>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만화는 충분히 약점이 될만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1. 등장인물들이 단 한번도, 12권 완결편에 이르기까지 단 한번도 연애 비시무리 한것도 안한다.
2. 순정만화 풍의 그림체인데, 알고보면 명랑만화다.
3. 작가의 그림이 1권에서는 뭔가 어설프다가, 뒷권으로 갈수록 점점 좋아진다. (이건 약점이 아닌가?)
4. 다음권을 읽지 않으면 궁금증 때문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만화방으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장편구성이 아닌, 에피소드 구성이다.
등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만화는 역시 최고다.
그리고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하는 대목이야말로 이 만화의 가장 멋진점일 것이다.
• •
이 만화는 최근 다시 '애장판'이라는 형태로 다시 나왔는데, 모든 '애장판'이라는 게 그렇듯 <닥터 스크루> 애장판 역시, 별루 그럴 필요도 없는 종이질만 뺀들뺀들해진 운치없는 책이 되어있다.
기껏 지금까지 정들어온 주인공들의 한국식 이름(찬우, 강민이, 태영이, 유교수 등등)이 일본식 오리지날 이름(마사키, 니카이도, 세이코, 우루시하라 교수 등등)으로 고쳐져서 나온걸 애써 기뻐해야 할 것인가. 흠..
어쨌든, 이 '애장판'의 유일한 장점이랄만한 것은 역시 책 맨뒤에 붙어있는 보너스다. '메이킹 오브 <닥터 스크루>'라는 것이 그 제목인데, 이 몇 페이지 안되는 서플이 또 본편 못지않게 재밌고 웃기다.
혼자 탄 만원버스에서조차 미친넘마냥 껄껄껄 웃게 만드는 그 유머감각..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그 은근하고도 미묘한 유머감각에는 과연 존경의 념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완결편인 12권에 실린 보너스는 지금까지 독자들에게 받은 편지에 대한 얘기였는데, 그 중 필자의 심금을 가장 결정적으로 울린 대목이 있었으니.. 적어본다.
저를 위로해준 편지도 기뻤답니다.
제가 죽을 때까지 그려주세요. 제가 죽은 후엔 그리면 안 돼요.
(위로 맞나?)
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대목을 보면서 꺼이꺼이 웃지만, 이건 작가가 팬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거의 최고의 찬사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팬으로부터 이런 편지를 받을 수 있는 작가는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 •
모두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길 '작가주의 작가'가 되고 싶어 발버둥을 치는 요즘같은 시대에, 독자 또는 관객들과 이런 즐거움을 나누는 진짜 작가는 과연 몇이나 되는걸까.
정작 우리가 '작가주의'라고 부르는 것에선, '작가'는 사라져가고 있는게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