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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book
한동원의 글 수첩


하지만, 오노요코 '전시회'는

2003 8. 16





었던대로, 오노 요코전은 막상 볼 때 보다는, 보고 난 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생생하게 모습을 갖춰가는 전시였다.

마치, 현상액에 넣은 인화지에서 천천히 이미지가 떠올라, 마침내 사진으로 제대로 모양이 잡히는듯한 느낌인데... 그게 어떤거냐구? 필자도 안해봐서 모르닝깐, 대충 알아서들 넘어가 주시기 바란다.

어쨌든, 이런 느낌이 들었던 것은 물론,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소박한 의미심장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더 큰 기여를 했던 건 따로 있었다.

그것은, 전시회장 안에서는 최대한 관객들을 집중시키지 않는 것을 지상목표로 삼고 있던듯한 전시회 그 자체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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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전시장 안은 잊을만하면 울려퍼지는 경보벨 소리로 충만하여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기 전에 나는, 불규칙적으로 경보벨 소리를 내는 작품같은게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진짜 경보벨 소리였다.

도대체 뭔노무 최첨단인지, 어딨는지 보이지도 않는 감지센서 덕분에, 작품 근처에 콧등만 들이밀어도 경보음이 울린다.

그러면 상당히 지친듯한 표정의 미술관 직원이 다가와서 벨소리의 의미에 대한, 결코 반박할 수 없는 결정적 해석을 내리고 사라진다.

"작품에 손대시면 안됩니다."

벨소리를 '삐삐삐..'소리 말고 "작품에 손대시면 안됩니다"라는 목소리 녹음으로 대체 했더라면 훨씬 효율적이었을것을.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물론 작품이, 물감으로 그려져서 때묻으면 안되는 것이라던가 쉽게 망가지는 약한 것이라던가 한 경우라면, 그런 거 이해가 간다.

하지만, 예전에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봤던 팝 아트 특별전에선 그런 작품들 꽤 많이 전시되었던데가, 유모차에 애들을 둘셋씩 데리고오는 젊은 엄마들도 엄청 많았는데도 경보벨 같은건 어디에서도 울리지 않았었다.



나도 그 수줍음의 사다리를 올라가서, 수줍음의 돋보기를 손에 들고, 수줍게 적혀있는 'YES'를 보고 싶었다.


더군다나, 이 전시에서 공개된 오노 요코의 작품들은 관객이 망치질하고, 뽄드로 붙이고, 물주고, 움직이고, 가지고 놂으로써 완성되는 작품이 대부분이었고, 심지어는, 이 전시회에서 기록필름으로 보여주던 오노 요코의 가장 유명한 퍼포먼스 '자르기'는, 아무 표정없이 무대에 앉아있는 그녀의 옷을 관객들이 원하는 만큼 가위로 잘라내는 것이 아니었던가.

나는, 이 '자르기' 공연 도중 갑자기 경보벨이 울리고 직원이 황급히 무대위로 뛰어 올라와서 "작품에 손대시면 안됩니다"라는 멘트를 날려주는 상황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그 직원들이 하고 있었던건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라는 퍼포먼스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그랬다면, 그 작품 이해 못하고 투덜거리는 나같은 조또무식들을 위해 해설이라도 해주지 그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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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 전시회에서 보여준 두번째 관객 집중 방지용 장치는 바로 전시장 이곳 저곳에 붙어있던 작품 해설이었다.

도대체 읽으란 소린지 말란 소린지, 시도때도 없이 경보벨 울리는 그 현장에서 5cm 공중부양할 정도로 정신집중을 해야만 간신히 이해가 갈까말까한, 난수표같은 해설은 차라리 없는게 나았다. 그 해설문에서 오로지 작품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돕고 있었던 건, 오노 요코나 존 레논같은 사람들의 얘기를 인용해놓은 문구들 뿐이었다.

그렇다. 이 전시회에서 최고로 난해했던 대목은, 그 어떤 작품도 아닌, 단연 그 작품 해설문이었던 것이다.

마치 관객을 더욱 헷갈리고도 두렵게 만들어 끝까지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이 목표인듯, 예의 그 되도않는 전문용어 섞어가며 횡설수설을 해놓은 해설들.. 그거 쓴 분이여, 너같으면 그거 읽고 싶겠냐?

이 전시회같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굳이 구차한 말이 필요없는 전시회에서마저, 이런 말도 안되는, 해설문 아닌 해설문을 마주쳐야 했다는 건 정말이지 괴로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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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시회에서 진정 경보벨로 경고를 줘야 했던 건, 작품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보고 느끼고 만지고 싶어했던 그 관객들은 결코 아니었다.

한국의 관객들은 대체 언제까지 이런 천박한 엄숙함과 조악한 고급지식을 참아줘야 하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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