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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book
한동원의 글 수첩


<젠틀맨 리그> 그리고 숀 코너리

2003 8. 19






봄부터 지금까지, 대박영화의 간판을 내세운 영화들 중 여러가지 면에서 가장 볼만한 영화라 사료되는 것은, 요즘 개봉된 <젠틀맨 리그>다.

일단, 18세기 마지막 해라는 시대 설정도 그렇거니와, 그걸 최대한 활용해서 각종 과학/모험/괴기/공포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를 빌려와서 살짝 바꿔놓는 설정 또한 상당히 재미있는 것이었다.

또한, 도시 하나를 반쯤 때려부수지만 나름대로 그 이유가 분명한, 개연성있는 뽀개기와, 상당히 멋들어지면서 나름대로 기발찬 메카닉들의 디자인 또한 당 영화를 볼만한 영화로 만들어주고 있다.

물론, 이제 역사의 중심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간다..스러운 얘기를, 까놓고 얘기하는 것보다 더 까논 느낌의 은유로 마무리짓는 결론은 다분히 재수없는 것이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뭐 지들끼리 그러구 놀라구 냅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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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런것들보다도, 이 영화를 웬지 봐도 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영화로 만들어주고 있는 핵심 요소는, 뭐니뭐니해도 단연 코너리 大人이라 할 것이다.

그는 영화가 시작된지 채 10분도 되지 않아 그는 그만이 날려줄 수 있는 한 방을 날리며 좌중을 압도하는데, 이 영화에서 속출하는 수많은 삐까뻔쩍한 장면들 중에서 이 장면이야말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었다. 언제나 얘기했던 것처럼, 결정적 한 방의 힘은 그 어떤 스펙타클도 능히 제압하는 것이다.

어쨌든, 그 장면을 얘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숀 대인이 연기하는 사냥계의 완전달인 '알란 쿼터메인'..

영화 초반, 자객들은 그가 은둔하고 있던 케냐 한 구석의 마을까지 찾아오고, 당연히도 얘들은 즉각 숀 대인의 응징을 당한다. 그 응징의 와중, 마지막 한놈이 도망을 치자, 숀 대인은 문간에서 장총을 조준한다.

하지만, 그 거리는 실로 허벌나게 먼 거리였고, 숀 대인은 고요히 총구를 내린다. 동시에, 옆에 있던 엑스트라급 조연이 "거봐요. 그건 무리예요" 어쩌구저쩌구 운운하며 염장성 대사를 날린다. 물론 이 어택은, 곧 뭔가가 올 것이 올 것이라는 쎈타링성 신호탄에 다름이 아니다.

그리고, 그 쎈타링성 대사를 받은 숀 형님이 묵묵히 안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다름아닌, 돋보기 안경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경을 끼고 난 뒤, 내렸던 총구를 다시금 겨누며 가벼이 날려진 숀 형님의 한 방을 보라...

"늙으면 죽어야지"

코오오...

바로 이런 것이야말로 진정 이 시대의 갑빠 정신이 마땅히 나아가야 할 바를 제시한 금자탑적 대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과거의 주윤발, 현재까지의 최민수 형님등이 보여준 무작정 각잡기를 통한 갑빠의 구축은 그 시대적 사명을 다하여, 이제 점점 구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는 추세다. 근래에 들어서만도, <청풍명월>의 불발 쌍갑빠가 이런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해주지 않았던가.

하지만 보시다시피 숀 대인은 갑빠는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퇴색하지 않았다.

<붉은 10월>, <인디아나 존스 3>등을 통해 꾸준히 실버갑빠의 영역을 개척해온 그가, 자신의 나이를 굳이 감추려 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역으로 이용, 과단성있게 실버 갑빠로 승화시켜낸 쾌거는, 그가 도달해낸 드높은 경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이제 그가, 주윤발 대인과 함께, 동서양을 양분하는 갑빠계의 살아있는 성인으로 추앙받을 날도 그리 멀지 않다 사료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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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안타깝게도, 이 인트로 대목이 끝나면 숀 대인은 그다지 하는 것도 없이 이리저리 세트장을 배회하는 방황을 일삼음으로써 고령을 실감케 한다. 주인공으로서 그가 보여주는 개점휴업 상태는, 무능한 주인공의 대명사라 일컬어지고 있는 <스타워즈>의 루크 스카이워커를 방불케하는 것이었으니, 그 아니 가슴살 미어질쏘냐..

하지만, 첫 장면에서 선보인 신개념의 한 방만으로도 숀 대인의 존재감은 결코 퇴색하지 않을 것이라 사료된다.

그의 노련하고도 중후한 한 방은, 다 늙어서도 견갑골 가득 삼두박근 불끈이며 어떻게든 한 껀 올리려고 끊임없이 자충수를 두던 아놀드와 대조를 이루며, 멋지게 나이먹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늙어서도 멋진 배우는 정말이지 흔하지 않다.

더군다나, 늙을수록 멋져지는 배우야 말할것도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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