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 마누라>의 추억
2003 9. 3
아직도 잠자리가 날아다닐것만 같은, 화창한 초가을의 어느날이었다.
볼일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강원도 원주에 가게 됐는데, 일 도중에 던킨 도너스에 뚫린 구멍 정도의 사이즈로 애매하게 시간이 비게 됐다.
어쩔 수 없이 원주 시내에서 뭔가를 하면서 개겨야만 했던 상황.. 그래서 보게 된 영화가 바로 <조폭 마누라>였다.
당시는 시사회 같은건 별로 챙겨보지 않던 시절이라 볼 사람들은 이미 다 본 끝물이었다. 당연히도, 행복과 웃음이 만발하며 아름다운 인정이 팔당댐 수문 개방시처럼 넘쳐나는 화목한 가정, 즐거운 직장, 건전한 사회의 수호를 위하여 불철주야 피나는 노력을 경주해 마지않는 각종 재래식 언론들이 일제히 <조폭 마누라>를 향해 발사한 십자포화는 이미 목격할대로 목격한 상황이었다.
당시 건전한국 절대수호의 성전에 나섰던 것은, 그 노무 영화 제목 듣기만 해도 당장에 토나온다는 듯이 '한국 영화의 퇴행적 징후 어쩌구 저쩌구..' 하던 각종 영화 언론들 뿐만은 아니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당시 무슨 시사 주간지에서는 이 영화에 대해서 전면 특집기사까지 났었더랬다. <조폭 마누라>가 한국의 사회악의 뿌리이자 근원이자 구근이자 줄기세포임을 부르짖는 "조폭문화, 한국이 멍든다"등등의 웅변적 헤드라인과 함께 말이다.
덕분에, 그 재래식 언론보도의 역효과로 인하여 필자는 '우오 얼마나 제대로 된 쌈마이길래..'하는 은근한 기대감에 부풀어 원주시 재래식 시장거리 한가운데에 있는 극장의 문에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최민수 형님의 모든 장면 중 단연 최고라고 사료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남긴 짙은 여운을 가슴살 깊이 아로새기며 극장을 나서면서,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이것이었다.
'이 영화는 바로 여기에서 보았을때만이 진정으로 이해될 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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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재래식 시장의 뒷길이라는 이 극장의 지정학적 조건이 <조폭 마누라> 관람을 위한 기초적 배경을 확립해주고 있다. 만일 극장표를 사고 비는 시간이 생기면 인근 솔다방에서 커피에 생계란 풀어서 한 잔 꿀떡...하면 좀 쏠릴려나. 여튼 그런 시간에, 미치코런던 로고가 붙어있는 몸빼 바지같은 재래식 시장의 정취에 몸을 한 번 푹 담궜다 빼면 된다. 그럼 일단, 상영관 진입 전 정신적 준비운동은 완료다.
그리고, 마침내 상영시간이 임박하여 극장 안으로 들어선다. 그곳에서 관객들이 마주치게 되는 것은, '무늬만 멀티플렉스' 같은 것이 아닌, 그 옛날의 그 운치를 그대로 간직한 '개봉관'의 풍경이다.
우선, 고등학교 복도를 연상케하는 극장홀의 콘크리트 바닥 위에 상징적으로 우뚝 솟아있는 것은, 하단에 금색 페인트 붓글씨로 인근 양복점 이름과 사장님 성함 그리고 전화번호가 아로새겨져 있었던 거대 어항이었다.
애기 팔뚝만한 잉어떼가 노니는 그 어항을 뒤로하고, 상영관 입구가 있는 2층 계단을 오르면, 베이스 솔로 다음에 따라오는 드럼 솔로처럼 벽면에 걸린 초대형 전신 거울을 맞딱뜨리게 된다. 그리고 그 거울에 예의 그 금색 페인트로 그려진 마주보는 봉황 두 마리 사이에 '축 발 전'이라는 궁서체 글자가 아로새겨져 있으리라는 것은, 이젠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넙적한 양은 재떨이가 놓여있는 짱깨집용 탁자가 놓여있는 상영관 입구에 들어서면, 한때 우리나라의 문맹률 저하에 일익을 담당했다고 전해지기도 아니하는 붉은색 '가열' '나열' '다열' 불빛이 스크린 밑의 무대에서 번쩍이고 있다.
이에 화답하듯, 의자의 나무 등판에선 어느 이름모를 로컬 서도인의 글자인듯한 좌석번호 붓글씨 '가37' '다19' 등이 정겨운 흰색 유광 페인트로 빛나고 있었다.
이쯤되면 이건 완전 <야인시대> 세트장에 다름이 아닌거지.
스크린 사이즈와 현재 관객수에 비해 터무니없이 방대한 극장 사이즈에 적응할 틈도 주지 않고, 궁디모양에 맞춰 반질반질 닳아있는 비로도 방석이 깔린 좌석에 앉자마자 곧장 오프닝 광고영화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오프닝이야말로, 이 모든 필의 총아에 다름이 아니다.
헐리우드 대박영화 예고편 따위가 웬말이냐는 듯, 버럭 호쾌한 기세로 시작된 그 오프닝의 서두는, 에코 사백만 가미된 낭랑한 목소리의 "광명당 안경워워워...언"이었다.
일전에 <닥터 스크루> 얘기를 하면서 언급했던 바 있던, 바로 그 로컬 광고.
그 절절한 80년대 재개봉관 필의 총아가 바로 이 원주의 극장에서 여전히 그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레인보우 레스토랑'의 야외 옥상에 앉아 무지개빛 분수대를 배경으로 와인잔을 부딪치며 적색 파라솔 밑으로 감추어진 정념의 눈길을 뜨겁게 주고받던 그 흰색 정장의 남녀의 모습을.
그리고, 그 흰 정장의 남성이 읊조리던 그 가을빛 매혹의 바리톤을..
"아름다운 레인보우 나잇이예요..."
코오오...
이렇게 그때를 회상하고 있으니, 아직도 그 끈적한 울림은 나의 귓전에 생생하게 들러붙어 있음을 느낀다.
그렇게 레인보우빛 에코에 온 몸이 촉촉히 적셔진 상태로 보게 된 <조폭 마누라>.. 그 앞뒤 눈치보지 않는 저돌적이며 호방한 쌈마이 필은, 잘 다져진 소갈비에 양념 배어들듯 온몸으로 흡수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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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 마누라> 보기 위한 가장 좋은 장소는 어디인가.
누군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나는, '화창한 초가을 한낮의 그 한가로운 극장'이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때로는, 어떤 시간과 장소만이 어떤 것을 위한 유일한 곳이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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