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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book
한동원의 글 수첩


BK, 그리고 SRV

2003 10. 15




병현이 월드시리즈 챔피언쉽에서 출전선수 소개를 할 때 손에다가 백색 양말을 끼고 등장했다고 한다.

그 백색 양말의 영문과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던가....

..를 추론한 결과, 다음과 같은 몇가지 가설에 도달하였다.


  • (1) 손이 상당히 시려웠다

  • (2) 덕아웃에서 빵꾸난 양말을 때우고 있던 중, 갑자기 호명됐다

  • (3) 알고보니 양말형 글러브였다

그런데 이러한 합리적 추정들과는 무관하게, 세간에서는 이를 이른바 '뻑큐사건'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서 받아들이고 있는 듯 하다.

그게 어떠한 공정을 거쳐서 사과의 의미로 해석되는지는 잘 모르겠다만...여튼 그렇다니 그런줄 알아야지.

어쨌든 그러하다면, 팔뚝으로 대형 뻑큐를 날리지 않았던 것만큼은 상당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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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얘기를 듣고 나서 생각난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 사람은, 아는 사람은 완전 알고 모리는 사람은 완전 모리는 불세출의 블루스 기타리스트 스티비 레이 본(Stevie Ray Vaughan, 이하 SRV)이다.


SRV의 뒷모습 사진을 사용한 굴지의 기타 메이커 Fender사의 광고


이 사람은 무명 시절부터 이미 탄탄히 완성된 연주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사람인데, 고수는 어디에 갖다놔도 티가 난다고, 데뷔 앨범을 내기도 전에 그 유명하다는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Montreux Int. Jazz Festival)에 초대되는 행운을 얻게 된다.

그리하여 SRV는 자신의 밴드(라봤자 베이스와 드럼 덜렁 두명이지만) 더블 트러블Double Trouble과 함께 세계 각국의 재즈 뮤지션 뿐만이 아니라, 유명 스타들도 우글우글 모여든 이 페스티벌에서 연주를 하게 된다.

그리고 SRV는, 당연히, 손가락이 뿌러지도록 기타 네크가 뽀사지도록 자신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하지만.

텍사스에서 온, 어디서 듣도보도못한 무명 기타리스트에게 관객들이 날린 것은 환호가 아닌, 영문과 이유와 까닭을 알 수 없는 야유였다.

기타를 양 어깨에 얹어놓고 치는 SRV 특유의 필살기마저도 점점 심해지는 야유를 잠재우는데 역부족이었고, 결국 마지막 곡이 끝나자 콘서트장은 보름달밤 그랜드 캐년의 늑대울음 소리를 방불케하는 야유 소리로 가득 찼다.

당연히도, SRV는 엄청난 상심을 안고 무대를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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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날의 SRV의 연주는 훌륭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야유가 입혔을 타격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블루스가 특히나 필링feeling을 생명으로 하는 장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이 공연은 결국 SRV가 세계적인 기타리스트로 알려지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객석에서 SRV의 연주를 지켜본 데이빗 보위와 잭슨 브라운같은 거물급 뮤지션들이 그날 밤으로 잼 세션을 청했고, 결국 SRV는 데이빗 보위의 부탁으로 "Let's Dance" 앨범에서 기타 솔로를 녹음하게 된다.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Let's Dance"는 세계적인 메가 히트를 기록한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은 앨버트 킹의 손맛을 그대로 계승한 이 무명 기타리스트의 존재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같은 해에 SRV와 더블 트러블의 데뷔 앨범이 발매되면서, 완전 께임은 끝나고야 만다.

그 공연으로부터 3년후인 85년.

세계적인 기타리스트로 다시 몽트뢰 페스티벌 무대에 서게 된 SRV에게, 이미 관객들은 그가 무대에 서기 전부터 환호를 날릴 만반의 준비를 끝내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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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V가 세상을 떠난지 뒤 9년이 지나서야, 그 82년의 공연과 85년의 공연을 묶은 CD가 발매됐다.

이 CD 뒷면에 이 공연에 대해서 더블 트러블의 베이시스트 타미 섀넌Tommy Shannon이 한 얘기가 있는데,

이걸 BK에게 전해주고 싶다.

나 자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도.



"때로 실패처럼 보이는 일들은,

정체를 감추고 있는 성공일 경우가 많다."



:: Stevie Ray Vaughan & Double Trouble ::
< Chitlins Con Carne >





ps. 그래도, 앞으로 뻑큐는 안하는게 좋겠다.
대형이건 소형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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