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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book
한동원의 글 수첩


<스모크>에서 - #1

2003 10. 25




<스모크>의 한 장면을 갈겨 적은 폴 오스터의 노트 - 멋진 글씨다. 잘 안보이시겠지만서두...


쩍지근한 하드카바로 중무장한 작품 전집이 출간될 정도의 '유행 아이템'이 되기 전, 폴 오스터라는 작가를 알게 된 건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것도 <스모크>라는 영화를 통해서 알게 된 건 더더욱 다행이고.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를 뒷골목 쓰레기통 벽에 눌어 붙은 썩은 바나나 껍질 같은 칙칙한 소설이나 쓰는 작가로만 알고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말이다.

어쨌든, 이제 제대로 된 찬바람도 불고, 호빵과 오뎅과 호떡의 계절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는 것 같으니, 이곳에도 조개탄 난로에 얹어놓은 주전자 같은 따뜻한 뭔가를 하나 갖다 놔야 할 것 같다.

해서, 언제봐도 소름이 돋을만큼 멋진 온기를 품고있는 영화 <스모크>에서 멋진 대목들을 몇 개 집어다 갖다 놓기로 했다. 난로에 조개탄 몇 알 넣듯 말이지. 후후...

오늘은 그 첫번째 조개탄.

••

오기 (계속 미소 지으며)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 알 수가 없을거야, 친구.

무슨 소리야?

오기 내 말은, 자네가 너무 빨리 보고 있단 얘기야. 자넨 사진들을 안보고 있어.

다 똑같은 사진들이잖아?

오기 다 똑같지. 하지만, 한 장 한 장은 다 달라. 밝은 아침도 있고 어두운 아침도 있어. 여름 햇빛이 다르고 가을 햇빛이 달라. 주중의 날들, 주말의 날들. 코트를 입고 장화를 신은 사람도 있고, 반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사람도 있어. 어떨 때는 같은 사람들이 보이고 어떨 때는 다름 사람들이 보여. 계속 낯선 사람들이 보이기도 하고 낯익은 사람들이 안 보이기도 하지.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고ㅡ 태양에서 오는 빛은 매일 다른 각도로 땅에 부딪히지.

(앨범에서 고개를 들어 오기를 본다) 더 천천히 보라고? 응?

오기 그래, 그랬으면 좋겠어. 자네도 알지.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시간은 하찮은 듯한 걸음걸이로 기어간다.


• •


그래,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지...





text from <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열린책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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