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기고] 내 인생 최고의 추리소설
2005 7. 30
이 글은 <한겨레21> 별책부록
'비밀의 백화점'에 실린 글입니다
아 무 생각 없이,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심지어는 전화를 한 기자분마저도 어이없어 할 정도로 아무 생각 없이 원고청탁을 수락하고 난 뒤 약 30분이 경과했을 때 쯤, 갑자기 필자의 머릿속에서 강력한 적색경보가 발령되었다. 그 경보의 이름하여 ‘아뿔싸’ 경보.
지금까지 마주친 그 수많은 추리소설들 중에서 단 하나, 그것도 ‘최고의 작품’이라는 것을, 대체 어떻게 선정해낸단 말이냐... 차라리 내 인생 최고의 김치찌개를 선정했으면 했지 말이야...
그렇게 필자의 방황은 시작되었다.
살인 오랑우탄 뛰노니는 모르그街의 어둠침침한 모퉁이에서 시작된 그 방황의 발자국은,
10명의 피살 후보자들이 오손도손 고립되어 서서히 죽어가던 폭풍우 몰아치는 인디안 섬의 깎아지른 절벽을 지나,
동그란 안경알 뒤로 ‘북해만큼이나 공허한 두 눈’을 껌뻑이며 검정 우산을 만지작거리는 작달막한 신부가 “범죄자가 창조적인 예술가라면, 탐정은 비평가에 지나지 않지”라는 결정적인 대사를 흘리는 영국 시골의 교회묘지를 돌아,
소위 ‘사고(思考)기계’라 불리우는 창백한 얼굴의 사나이가 구두코에 묻어있는 구두약과 생선뼈로 옷 조각에 편지를 쓰는 탈출불능의 감방 주위로 둘러쳐진 차가운 콘크리트 벽을 통과하여,
네 개의 V자가 그려져 있는 얼굴 위에 중절모를 걸쳐놓은 채 한 손으로는 황금 매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조수의 가느다란 허리를 움켜쥔 사립 탐정의 암모니아 냄새 떠도는 사무실을 들른 뒤,
‘갈 때 마다 머리통을 새로 사야하는 곳’ 베이시티의 곰팡내로 찬 아파트 복도를 어슬렁거리다가 호되게 뒷통수를 얻어맞고 정신을 잃는 그 순간에도 38구경 자동권총 같은 유머감각만큼은 놓지 않는 또 한 명의 사립 탐정의 곁을 지나,
아내를 죽였다는 누명을 쓴 남자가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해줄 여인을 찾아 사투를 벌이는 사형수 감방 속으로 들어가면서도 멈출 줄 몰랐다.
과연 추리소설의 세계는 드넓고도 심오한 것이로다...를 되뇌며 여기저기 어지러운 발자국을 남기던 와중, 필자는 문득 느꼈다. 그 발자국을 뒤쫒고 있는 확대경의 존재를.
그리고, 그 발자국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렇다. 결국 그 발자국이 멈춘 곳은 모든 추리소설 팬들의 출발점, 바로 ‘베이커街 221 B번지’였던 것이다.
물론 셜록 홈즈보다 치밀한 탐정은 많다. 셜록 홈즈보다 리얼한 탐정 또한 많다. 셜록 홈즈보다 기발한 사건을 의뢰받는 탐정은 부지기수로 많다. 하지만 필자는 아직까지, 셜록 홈즈보다 매력적인 탐정은 찾아내지 못했다.
에큘 포와로의 회색빛 뇌세포도, 필립 말로우의 냉소적 유머 감각도, 브라운 신부의 귀여움도, 샘 스페이드의 V자 턱과 불굴의 완력도 셜록 홈즈의 파이프 담배의 푸른 연기 같은 매력을 이기지 못한다.
우리가, 총천연색 삽화가 들어있던 ‘팬더 추리문고’부터 강아지化 된 홈즈와 왓슨이 등장하는 만화영화까지, 어떤 식으로든 홈즈를 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명불허전. 그렇다. 바로 그거다.
하지만, 바로 이런 흔해터짐이야말로 우리로부터 ‘진짜’ 홈즈를 격리시키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여름시즌만 되면 쏟아져 나오는 각종 홈즈 컴필레이션 중 <셜록 홈즈의 모험>, <셜록 홈즈의 추억> 같은 정통 제목으로 묶여있는 건 발견 불가다.
대신, 몇 십 년이 넘도록 그 불멸의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는 ‘전집’이라는 정체불명의 제목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서로 경쟁적으로 끼워넣고 있는 ‘오리지날 삽화’는, 오랜 세월을 통해 만들어진 ‘내 머릿속의 그림’에 쓸데없는 참견을 할 뿐이다. 몇 십 년이 지나도 면면한 무성의함을 이어오고 있는 번역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하여, 올 여름 마침내 필자는 작정을 하고 홈즈의 ‘원서’를 구입해서 읽는 중이다. 물론 안 되는 영어로 버버거리면서 읽으려니 진도는 왕창 안 나가고 있다만, 뭐 그럼 좀 어때.
베이커 거리의 안개만큼이나 칙칙한 회색 재생종이에 아로새겨져 있는 이런 결정적인 대사를 원문으로 알현한다는 것은, 언제나 가슴 뛰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가 범죄 전문가가 됨으로써 연예계는 한 사람의 명배우를 놓쳤고, 더구나 과학계는 예리한 추론자를 잃은 셈이다."
- <셜록 홈즈의 모험> 중
'보헤미아 왕국 스캔들의 모험' 에서
•
<The Adventures and Memories of
Sherlock Holmes>
- Random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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