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내공이라 함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물론 각종 의견이 있을 수 있겠으나, 필자에게 내공이란
다름아닌 ‘쓸따리 없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그림을 그릴 때는 얼마나 화려하고 세밀하게 묘사하는가보다 언제
그리기를 멈출 것인가가 더 중요한 것이요, 글을 쓸 때는 어떤 이야기를 써내는가가 아니라 어떤
이야기를 쓰지 않는가가 더 중요한 일이로다... 뭐 이런 카인드 오브 얘기다.
이런 면에서 원고지 7매라는, 김 6장 가량에 해당하는 넓이의
공간에서 각종 종합 투덜을 일삼는 본 칼럼은 지난 일년 반의 세월동안 필자의 일천한 내공을 수련하는
커다란 도량이 되어 주었던 바, 이 자리를 빌어 씨네21 관계자 여러분과 독자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 드린다. 좀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여튼, 각설하고.
이러한 면에서 <왕의 남자>는 공력이 느껴지는 훌륭한
영화였다.
이미 닳고 닳도록 다뤄진 역사적 사실을 다룬 이러한 종류의 영화는,
기존의 해석들을 뛰어넘고자하는 과욕으로 인해 ‘과도한 창작의 오류’로
빠지거나, 아니면 별달리 새로운 해석이 안되는 경우 잔재주와 호들갑으로 그 공백을 메우고저 하는
‘공허한 오바의 오류’로 빠지기 쉬운 바,
그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한 방에 밀어붙인 힘은
확실히 ‘내공’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더랬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하지만, <왕의 남자> 역시 막판에
한 가지의 안타까움을 간직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당 영화의 엔딩 부분이다.
장생(감우성)과 공길(이준길)이 연산군 앞에서 마지막 살판을 놀면서
동시에 최후의 고공 점프를 하는 바로 그 대목까지는 매우 훌륭하였다. 근데, 거기에서 고마 딱
끝내지 그랬어.
시대와 욕망에 희생당한 광대들이, 결국은 모두 평화로이 모여
놀며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쟈의 손수건 뭐 그런데로 향한다....는 <왕의
남자>의 엔딩 15초는, 지금까지 결론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필 한껏 발산하던 당 영화의
내공 깊은 발걸음에 받다리 후리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사실 이러한 엔딩을 굳이 붙여야만했던 주최측의 고뇌 또한 짐작
아니 가는 바 아니다.
안그래도 상당히 무거운 필의 당 영화에서 마지막까지 그렇게 무겁고
비장하게 끝을 낸다면, 그 헤비함을 떨치지 못하고 극장문을 나서는 관객들 사이에서 그닥 바람직하지
않은 입소문이 날 것을 우려한 그 번민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감이다.
하지만 앞으로 그러한 근심걱정은 거두시라 말씀드리고 싶다.
<왕의 남자> 같은 잘 된 영화로, <킹콩>같이
각종 힘으로만 들이박은 영화를 박스 오피스 1위의 자리에서 끌어내는 관객들에게 그런 식의 근심걱정을
해주는 일은, 상당한 실례니까 말이지.
씨네 21 537호 (05년 1월 셋째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