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추석에는 ‘올 추석에는 성룡 영화가
없어서 버럭 안타깝다’는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올해는 다행히도 아니어서 참으로 흐뭇했다.
그것도 CG로 발라놓은 헐렁헐렁한 액션만이
난무하던 헐리우드산 성룡영화가 아닌, 확실하게 성룡스러운 영화여서 개인적으로 무척 기뻤더랬다.
물론, 액션을 위해 스토리상의 말 됨이 희생된
경향이 없지 않아 많았다만, 뭐 그 정도야 충분히 접어줄 수 있다. 그 연세에 그 액션인데
말이야.
소시적, 성룡 영화의 훌륭함의 원천은 단지
근면 성실한 액션에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세계 정형외과 환자 연합 의장을 먹을만큼
화려하다는 그의 부상에 대한 얘기와, 그 순도를 공증해주는 인증서와도 같던 엔딩의 NG 모음을
볼 때, 필자는 그것을 단지 액션의 감흥을 증폭시켜주는 장치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더랬다.
심지어, NG 모음에서 최소한의
생명유지를 위해 했다는 피아노줄을 보았을 때 실망 비슷한 것까지 하려 했더랬다.
헌데, 이번 <BB 프로젝트>의
NG 모음을 보던 필자는 이전과는 뭔가 미묘하게 다른 느낌, 그러니까 감탄이나 경악과는 확실히
다른, 그런 감정을 느꼈다.
이건 뭘까. 꽤
오랫동안 그 정체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하고 있던 필자는, 마침내 <월드 트레이드 센터(이하
WTC)>를 보고 나서야 겨우 알게 됐다.
그 감정의 정체는 다름아닌 ‘염치있음’에 대한
감동이었다는 것을.
올리버 스톤은 <WTC>에 대해
‘나는 정치적인 판단을 배제하고, 개인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라고 했다. 하지만 그
판단은 ‘배제’된 것이 아니라, 최소한 의도적으로 ‘회피’된 것이었고, 덕분에 <WTC>는
지금까지 나왔던 그 어떤 9.11 관련 영화보다도 강력한 정치영화가 되었다.
매몰된 두 명의 영웅적 소방관을 구출하는 영웅적
행동을 해준 뒤 “테러에 대응하려면 유능한 병력이 필요해”라는 대사 유유히 읊조리는 영웅적
아메리칸 머린코 예비역이 등장하는, <인디펜던스 데이>류보다도 훨씬 더 노골적이고
강력한 정치영화가 말이다.
그리고 필자는 올리버 스톤이 최소한, 이를
예측하고 판단하지 못할 정도의 바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라고 믿는다.
9.11 테러가 미국의 자작극이라는 대단히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하고 있는 <루스 체인지(Loose Change)>를 만든
사람은, 불과 스물 한 살 밖에 되지 않는 영화감독 지망생이었다. 결국 모든 것은 염치의
문제다.
WTC 잔해에 매몰된 소방관의 생명은 현미경처럼
비추면서도 미국의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에 매몰된 이라크 아이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것도 결국 염치의 문제요, 올해
만으로 쉰 하고도 둘이라는 나이에도 10층 짜리 건물 벽을 별다른 보호장치도 없이 굳이 맨몸으로
껑충껑충 뛰어 내려올 것인가 말것인가를 판단하는 것도 결국 염치의 문제다.
올리버 스톤은 그 염치가 없었고, 성룡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영화는 이렇게 극과 극으로 나뉘고 만다.
‘염치있음’이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씨네 21 573호 (06년 10월 둘째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