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터, 신문광고, 광고전단지 어디에서도 별로 부각시키지 않는 거지만, 사실 <매트릭스(The Matrix)>를 광고할 때 키아누 리브스(다분히 핑크 팬더스러운 썬그라스에 "나, 멋져?" 폼으로 서 있던 그..)못지않게 부각시켰어야 했던 건, 이 영화가 <바운드(Bound)>를 만든 워쇼스키 형제의 두 번째 시나리오/감독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시나리오면 시나리오, 연출이면 연출, 연기면 연기, 촬영이면 촬영, 미술이면 미술, 음악이면 음악, 거의 버릴 것이 없는 이 기막힌 데뷔작이 이 형제 감독에게 붙여준 '제 2의 코엔 형제'라는 영광스런(?) 별명은 그리 과분해 보이지 않았다.

이 똘똘한 형제 감독은, 이미 그 똘똘함을 세계 만방에 과시한 바 있는 선배 형제 감독 코엔 형제처럼 머리 속을 엎질러진 스파게티처럼 복잡하게 꼬아놓는 괴상한 느와르(<분노의 저격자(Blood Simple)>) 대신, '이상한(queer) 주인공(들)' 이 등장하는 아찔할 정도로 재밌고 기발한 느와르로 '어설픈 코엔 추종자'들이 판치는 어지러운 강호에 부는 바람을 잠재웠던 것이다..

그리고 3년..

그 워쇼스키 형제가 돌아왔다.


1. 특수효과 대잔치

녹색의 야릇하게 생긴 문자(사실은 대부분이 일어의 가타가나를 뒤집어 놓은 것) 속으로 카메라가 밀고 들어가면 <매트릭스>의 세계가 열린다. 그 세계는 우선 어두우며, 포스터의 검정색조와는 달리 녹색이 고, 이것들이 합쳐져서 만들어내는 그 비현실적인 음침함은 결과적으로 <다크 시티>의 그것과 많이 닮아있다. 말하자면 난방 안된 넓은 치과 병원 의자에 덜렁 혼자 앉아있는 느낌말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너무 어이없을 정도의 압도적인 시각/특수효과 퍼레이드가 시작된다.

하지만 그 화려한 백화점식 특수효과에 대해서는 감히(!) 여기서 주절주절 얘기하지 않겠다. 좀 야속한 얘기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궁금증을 푸시려면 직접 보시는 방법밖에는 없다. 한마디로 말하면 지금 헐리우드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몽땅 다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신문에서 너도나도 인용하던 'flow-mo'촬영(1초에 100프레임을 찍는 카메라 120를 동시에 가동하고 그걸 나중에 편집해서 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촬영법. 인물들이 좀 이상하게 움직인다 싶은 대부분의 장면은 이 촬영법에 의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실제 사진을 가지고 애니메이션을 만든 것)을 필두로 별의별 특수효과가 다 나온다.

정말 어디서 듣도보도 못하던 별의별 희한한 특수효과 대잔치다.

그 중 가장 인상깊었던 시각효과, 샘 페킨파가 창조하고, 소위 '홍콩 느와르'가 확립한 '슬로우 모션 액션'은 그 끝을 본다. 도대체 얼마나 고속촬영을 했길래 저런 그림이 만들어진걸까. 모르긴 몰라도 서울우유 왕관모양 물방울 찍을때보다 100배 정도는 고속으로 촬영을 했던 것 같다. 총으로 산산조각이 나는 벽돌 파편은 문어발처럼 흐느적거리면서 쏟아져 내리고, 폭발의 화염은 폭포처럼 흐르면서 퍼져나간다. 하지만 어디 이 뿐인가.. 이 영화의 SFX에 대해서 떠들기 시작하면, 이 내용만 가지고도 400줄은 가뿐히 넘을 것 같으니 그만하자.. 어쨌든,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영화에서 순수하게 시각/특수효과만.을. 즐긴다면 이 영화는 무.조.건. 봐야할 영화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영화는 그래픽의 언어다. 중요한 것은 그림이라고 생각한다"라는 얘기를 한 감독(들)의 생각은 영화속에 그대로 구현돼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

그 문제는 영화에서 순수하게 시각/특수효과 만을 즐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2. 사이버펑크 / 철학

이제 특수효과에 대한 얘기는 젖혀두고, '내용'에 대해서 얘기하겠다. 만약 "<매트릭스>는 어떤 내용의 영화죠?"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매트릭스>는 사이버펑크(Cyberpunk) 영화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가장 근접한 답일 것이다.

컴퓨터, 그리고 그것과 연결된 인공두뇌(cyber)를 가진 '젊은이들(punk)'이 가상세계안에서 기존의 억압적인 질서에 대항해서 한 판 싸움을 벌인다는 사이버 펑크의 일반적인 주제를 이 영화는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여기에 물론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나' 인가? 그리고 무엇이 옳은 것인가?"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주인공이 있다. 전형적인 사이버펑크다.

우리나라의 신문 기자님들이 이 영화의 SFX에 입이 떡 하니 벌어져, "이보다 더한 상상력은 없다"(한겨레 신문)같은 진부한 감탄사를 늘어놓는 사이에 놓치고 있는 중요한 사실은 "이보다 더"할 것이 없다는 이 영화의 "상상력"이 그닥 독창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영화의 '상상력'은 이미 수 많은 사이버펑크 과학소설(SF)들이 확립하고, 또 마르고 닳도록 써먹은 것들이 아닌가. 간단히, 이 영화가 강력하게 참고하고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 기동대(Ghost in the Shell)>만 보더라도 이 영화가 워쇼스키 형제의 독창적인 상상력에 의존하고 있는 영화는 아니라는 사실은 쉽게 확인된다(따라서 "이보다 더한 상상력은 없다" 라는 헤드라인은 "이보다 더한 비쥬얼은 없다"로 고쳐져야 마땅하다. 아마도 우 리나라의 영화담당 기자분들중 상당수는 '상상력'과 '시각/특수효과'를 별루 구별 안하시는듯).

사실 <바운드>를 만들었던 워쇼스키 형제에게 기대하고 싶은 것은 기발한 상상력이라기 보다는, 기존의 장르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살짝 비틀어서,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내는 영리함이다. 그리고 그 영리함을 뒷받침해주는 치밀한(치밀하다는 말은 아껴뒀다 이런데 써야하는 말이 아닌가요) 심리/두뇌게임, 그리고 그에 걸맞는 재치있는 스타일(≠ 시각/특수효과)이 워쇼스키 형제를 '뜨게'만든 원동력인데 <매트릭스>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이 가장 아쉬운 점이다(그 아쉬움은 물론 '멋진 그림'에 대한 워쇼스키 형제의 집념 - 사실은 집착에 가까운 - 덕분에 생긴 것인데, 그 멋진 그림은 과연 만화/영화광 감독답게 수많은 영화들을 참고로 만들어져있다. 이 영화가 참고/인용하고 있는 듯한 영화들 을 몇개만 짚히는 대로 꼽아봐도, <스타워즈>, <터미네이터>, <블레이드러너>, <첩혈쌍웅>, <용쟁호투>,, <다크맨>, <토탈 리콜> 등등... 물론 <공각 기동대>는 말할 것도 없고).

그리고 아쉬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필자는 내용면에서는 이 영화가 처음부터 지는 게임을 시작한게 아닌가하는데, 그건 다분히 개똥철학스러운 이 영화의 '주제' 때문이다. 워쇼스키 형제, 정말로 자신들을 코엔형제와 혼동한 것일까, 생물학적 결정론, 주관적 관념론, 노장(老長) 사상이 짬뽕이 된 '철학'을 '저항군'의 대장 모피스(로렌스 피시번)와 저항군의 정신적 지주 오라클(글로리아 포스터 분)의 입을 통해 풀어놓는다. "내가 나비의 꿈을 꾸는 것인가, 나비가 나의 꿈을 꾸는 것인가.." 별로 자신있게 얘기할 자신도 없는 이런 주제를이 영리한 형제 감독이 굳이 택했던 이유는 뭐였을까. 이건 이미 그들의 선배 감독들이 닳도록 다뤘던 진부한 주제 아닌가.

결국 인간들의 세계 자체가 '매트릭스'라는 재밌는 발상에도 불구하고, 감독(들) 이 설파하는 설득력없는 '철학'은, 삼시세끼 죽을 먹고 누더기 옷도 마다 않고 칙칙하기 그지없는 전함을 타고 다니면서 힘들게 힘들게 '진실을 쟁취하기 위한 저항'을 계속하는 저항군을 오히려 불쌍하게 보이게 한다. 그래서 영화 중반, 저항군을 매트릭스에 팔아먹는 넘의 배신에 외려 더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이다 "음.. 나 같아도 저 러겠다.. 저항군들 중에서는 XXX가 제일 인간적이구만..". 그 결과가 어떨지도 알 수 없으면서, '그저 그것이 진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진리를 위해 이 한 몸 바쳐 싸우는' 저항군의 행동은 사이버펑크의 주제와는 너무나 튄다. 이 '탈중심의 포스트 모던의 시대'에는 더더욱.

3. 연기

또 하나의 아쉬움은 주인공 토머스 앤더슨/네오를 연기하는 키아누 리브스다. <스피드> 이후, 오랜만에 거물급 액션 영화에 출연한 그는 안타깝게도 <스피드>의 '착한 액션'을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해커였다가 매트릭스의 진실을 알게되는 초반부에는 그 무력해 보이는 표정이 어울린다. 하 지만 매트릭스와의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하는 후반부에서 저항군의 중심이 되는 그는 좀 더 믿음직하게 변해있어야 했는데..

키아누 리브스의 이런 연기는 영화 내내 그의 상대역으로 나오는 모피스 역의 로렌스 피시번의 노련한 연기와 대조되면서 더 초라해 보인다. 그리고 무척 애쓴 흔적은 보이지만 키아누 리브스가 보여주는 어정쩡하기 그지 없는 쿵후 자세는 성룡의 화려한 무술에 익숙할대로 익숙한 우리들의 눈에는 코메디가 될 수 밖에 없다. 홍콩에서 수입했다는 '와이어 스턴트'를 동원한 특수효과도 이것을 가려주지는 못했다.

하긴 이 정도의 돈을 들인 영화라면 키아누 리브스 정도의 스타를 썼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조연들의 캐스팅은 아주 좋았다고 생각되는데, 그 중 로렌스 피시번과 '냉철'과 '교활'을 적당히 조화시키고 있는 휴고 위빙을 매트릭스 보안요원의 대장인 '스미스 요원' 역으로 캐스팅 한 것은 절묘했다. 그리고 <바운드>에서 두 여자에게 신나게 당하는 마피아 새끼 두목으로 열연했던 조 판돌리아노가 저항군 중 한명인 '사이퍼' 역을 맡아 머리를 빡빡밀고 연기하는걸 보는 것도 재밌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사이퍼'가 좀 더 비중있는 역이 되었더라면 재밌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4. 수면부족

하지만, 사이버펑크가 어쩌니, 철학이 저쩌니, 연기가 어땠니 하는 이런 얘기들은 모두 쓸데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이 영화는 '이야기'보다는 '멋진 그림'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영화가 아닌가. '신기한 그림'에 대한 욕구를 넘치도록 충족 시켜주고 있는 이 영화에 대해 이런 아쉬움들을 늘어놓는다는 건 실례일지도 모른다.

사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디자인 - 특히 매트릭스의 로봇들이 인간을 배양하는 '인간 농장'의 디자인은 압권 중 압권 - 이나 SFX의 수준은 과연 이 분야에서의 전 지구적 리더가 누구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압도적인 특수효과 앞에서도, 바닥이 들썩거릴 정도의 엄청난 디지틀 음향 속에서도 필자는 두 번 정도인가 깜빡 졸뻔한 위기를 간신히 넘겼다. 세계 최고의 두뇌들이 6천 3백만 달러라는 거액을 써가며 만든 이 영화앞에서 졸 뻔했다는 사실을 '수면부족' 말고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건 분명히 <매트릭스>가 닳고 닳은 이야기를 지루하게 늘어놓았기 때문도 아닐 것이고, 그 지루한 이야기 뒤에 마치 '숲속의 공주와 개구리 왕자' 같은 어이없는 결말을 지었기 때문도 아닐 것이고, 키애누 리브스가 시종 멍 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도 아닐 것이고, 러닝타임이 길어지건 말건 내가 좋아하는 영화 장면들은 모조리 패로디 해주자는 감독(들)의 과잉의욕 때문도 아닐 것이다. 분명히 아닐 것이다.

이건 분명히 수면부족 때문이다.

아마도 분명히 그럴 것이다..


5. 덧붙여서

1. 또 하나 분명한 사실 하나. 이 영화 자체의 완성도는 논외로 하고, 이 영화에서 거둬들인 특수효과의 혁혁한 전과는 이후 헐리우드 영화가 전 세계 '영화팬'들의 주머니에서 또 한번 돈을 끌어내는 무서운 에너지가 될 것이 틀림 없다. <어비스>에서 축적된 특수효과의 성과가 <T2>로 폭발했듯이 말이다.

우리나라 영화가 이제 겨우 <다이하드> 비시무리한 흉내를 내면서 자화자찬 하고 있는 동안, '원조'들은 자기 영역에서 이렇게 앞서가고 있다. 그렇다면, 그렇게도 헐리우드를 '이기고' 싶다면, 우리가 어느 쪽으로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는 명확해진다. 아니, 최소한 어느 쪽에서 승부를 걸어서는 안되는지는 명확해 진다. 그렇게도 헐리우드를 '이기고' 싶다면 말이다.

2. 광고 중 이 영화를 가장 잘 표현한 카피 - "한 편의 긴 CF를 본 느낌이다" 그런데 뭘 광고하는 CF인지. 혹시 '미국 영화제작자 협회 산하 시각/특수효과 감독 협회'의 광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