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우

"Size does matters"라는 <고질라>의 걸작 광고문구가 어울리는 우리 나라 영화 는 <용가리>도, <쉬리>도, <건축 무한 육각면체의 비밀>도, <유령>도 아니다. 이 광고 문구가 제일 어울리는 영화는 바로 내가 오늘 본 <내 마음의 풍금>일 것이다.

근데 이 영화에서 matters 하는 Size는 주연배우의 Size와 영화의 Size(러닝타임)이다.

필자가 제일 궁금했던 건, '전도연이 정말 초등학생 같아 보일까'하는 것이었다. 서른에 가까운 나이에 초등학생(아냐, 60년대니까 '국민'학생이지) 연기를 한다니 이건 거의 스턴트라고 할 수 있을꺼다.

그런데 극장안에서 속으로 "와--"하구 놀랐다. 정말로 전도연이 초등학생 같아 보이는 거다. 첫 장면, 그러니까 애들이 고무줄 하면서 노는 장면에서 한 눈에 전도연을 알아보지 못한 건 필자 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긴 촬영할 때 스탭들도 진짜 아이들 큼에 섞여있는 전도연을 못 찾아낼 정도였다니 속아 넘어간 내가 이상한 건 아닌거다..라고 우길란다.

어쨌든 결론은 전도연이 아니었으면 <내 마음의 풍금>은 만들기 힘들었거나, 불가능한 영화였을 꺼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여배우 중에서 이런 스턴트를 이 정도로 잘 해 낼 배우가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전도연의 Size(B-W-H 사이즈가 아니다)는 정말 matters했다.

아니다. 생각해보면 전도연이 그렇게 키가 작은것 도 아니었던거 같은데.. 그럼 뭐였을까. 마스크? 연기력? 아님 전부 다? 어쨌든 전도연의 캐스팅은 단연 '올해의 캐스팅 상' 감이다.

그런데 필자가 극장 가기 전에 가장 두려워했던건 총각 선생님 역으로 이병헌이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아는 여자애들은 거의 이병헌을 좋아한다지만, 난 이병헌이 부리부리한 눈갖고 느끼한 역 밖에 할 줄 모르는 배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지금 생각해보면 코믹하면서도 신파적이지 않은 이병헌의 연기를 본 게 제일 큰 수확이었던 것 같다. 이병헌이 연기해 낸 건 서울냄새 물씬 충기는 조각같이 멋있고 세련된 또는 느끼한 '이병헌적인' 선생님이 아니라, "이봐, 총각"하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은, 어설프면서 순진하고 어눌한 초짜 선생님이었던 거다.

처음에 선입견을 가지고 본 게 미안해질 정도로 이병헌, 은근슬쩍 이미지 변신에 성공하고 있었다. 오히려 전도연 보다도 더 큰 변신이라고 해도 좋다.

뭐, 이미연은 이미지 변신 같은건 하고 있지 않았지만, 나름대로의 역할은 잘 커버한다. '부잣집 딸 같은' 미소를 연신 남발하는건 좀 위태위태 했지만. 이미연 뿐만이 아니라 주연급들이 모두 그렇게 '착한 미소'을 남용했던걸 보면, 이건 '착한 영화'를 만들고야 말겠다는 감독의 의도 덕분이었을 것이다.

2. 감독

그렇다구 감독의 연출이 나빴던건 아니었다. 아니, 나쁜게 아니라, 좋.았.다.

이영재 감독은 하근찬이라는 소설가의 "자전적 경험"을 소재로 했다는 <여제자>라는 소설을 2년 동안 시나리오로 각색했다는데, 짤막짤막한 에피소드로 관객들의 감정을 끌고 가는 것이 참 구수하고 좋았다.

사실 젊은 국민학교 선생님과 '여제자', 하지만 선생님의 마음은 예쁜 여선생님에게 가 있고.. 이 정도 설정이면 얼마든지 신파로 흘러버릴 법도 한데, 감독은 되려 이렇게 묻는다. "신파가 뭐요?"

주로 이런 류의 영화는 최소한 세 번 정도는 민망할 정도로 관객을 쪽팔리게 만드는 신파적 장면이 등장하기 마련인데, <내 마음의 풍금>에서는 그런게 거의 없었다.

3. 미술

거의 고고학적인 관심을 가지고 60년대를 재현해 놓은 세트와 소품들은 '야.. 저런 것까지 어디서 구했냐..'하는 신음이 나오게 하기 충분했다. 알고보니 없는 건 만들었다더라지. 숨은그림찾기처럼 화면에 숨겨져 나오는 옛날 물건들을 보고 극장 여기저기서 "야, 저거저거.." "그래, 맞어.."하고 수근거리는 소리를 , 이 영화의 미술을 맡은 MBC 미술센터 사람들이 들었다면 보람깨나 느꼈을꺼다.

특히, 거의 마지막 장면에서 전도연이 '통일 화판'을 들고 나왔을 땐 정말 경악이었다. 그래, 맞어. 어렸을 적에 '화판'이란게 있었어. 기억의 깊은 바다밑 바닥에서 건져 올려진 그 화판이 화면에서 펄떡거리더라니깐..

그리고, 정말 고고학 그 자체였던 건 거의 그대로 재현된 옛날 국민학생들의 생활상이었다. 정말 웬만한 건 다 모아놨더라구요. 이영재 감독, 6,70년대 국민학생들 일기장 수십권 수집한 다음에 이 영화 만들기 시작한게 아녔을까.

그게 뭐였는지는, 미리 알면 재미 없어지니까 얘기는 안하련다. 여튼 <내 마음의 풍금>은 교실 마룻바닥이 콘크리트로 바뀌고, 난로가 스팀으로 바뀌고, 삐그덕 거리는 나무 책상이 철제 책상으로 바뀌기 전 시대 국민학교에 대한 고고
학이었다.

4. 러닝타임

근데 영화는 영화고, 고고학은 고고학이니까 '다큐멘터리 지리산의 사계'처럼 '국민학생의 사계'를 모조리 담겠다는 생각은 버렸어야 하지 않았을까.

물론 조선일보 기자의 말씀처럼 "의도가 읽히는 설정들이 꼬리를 물면서 결국엔 자연스럽지 못해 보이는 역효과를" 냈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이 부분이 두번째로 Size가 matters하는 대목이다. 감량을 했어야 옳았는데, 상영시간이 너무 길어지고 말았다.

감독의 입장에서는 어느 하나도 버리기 아까왔겠지만. 이 영화의 애초의 기획이 '시대 체험 시뮬레이션'이었다면 몰라도 그게 아니었다면, 후반부는 과감
하게 쳐내던가, 좀 더 함축적으로 만들어야 했던거였다. '추억 러브 로망'의 결정판을 만들겠다는 감독의 욕심이 과했기 때문에 이 영화의 Size는 matters하는 것이 돼 버렸다.

에이, 하지만 뭐 어떠냐. 이 정도 악의 없고, 재밌고, 웃기고, 가슴이 아리는 영화를 본다는 것도 그리 흔한 기회는 아니니까. 어떻게 보면 강수하(이병헌)가 마을을 떠나가는 장면에서 연인간의 이별에서 오는 슬픔보다, 국민학교 졸업식에서 느끼는 아릿한 슬픔을 느끼게 된 건, 이런 뽕을 뽑는 '시대 체험' 덕분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를 보는 사이에 나는 나도 모르게 국민학생으로 돌아가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시대 체험 시뮬레이션'도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었던 거다.

5. 아쉬움과 용서

신문광고에서 꼭 놓치지 말라는 엔드 크레딧에서 밝혀지는 비밀 - 영화 맨 처음과 맨 마지막, 'LP를 트는 손'의 주인은 누구인가? - 은 끝까지 밝히지 않았더라면 훨씬 멋졌을껄 그랬다. 다 까밝히는거 보다는 여백의 미가 사는 것이 훨 낫지 않은가. 관객들의 항의가 두려웠나..

그리고 또 하나의 결정적인 실수가 있다. 홍연(전도연)이 17살의 늦깎이 국민학생이란걸 밝히거나 암시하는 부분이 한 부분도 없다는 거. 이건 잠깐이라도 시간을 할애해서 꼭 관객들에게 알려줬어야 되는거 였는데 말이다.

어쨌든, <내 마음의 풍금>은 사람들의 추억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뭔가 어색어색한 것 같은 분위기에서도 내 안에 잠자던 봄 같은 걸 깨운다는 점에서, 한 번 부담도 악의도 없이 웃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다양한 나이의 관객층이 나름대로의 즐거움을 찾으면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TV는 사랑을 싣고'와 많이 닮았다.

이 봄에 봄 소풍 가는 기분으로 '영화는 사랑을 싣고'를 보러 가시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권력 비판이 없는대신 훨씬 밝고, <아름다운 시절>의 심각함이 없는대신 훨씬 친근한 이 '추억 러브 로망'의 결정판을 말이다.

[덧붙여서]

아니나 다를까 조선일보 3월 12일자 <내 마음의 풍금> 평을 보니 아주 노골적으로 "<내 마음의 풍금>은 독특한 멜러영화다"라고 적고 있다. 뭐가 노골적이냐면, 그 단순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얘기다.

이건 비단 조선일보만의 단순함은 아니다. 우리나라 유일한 영화 주간지를 자처하는 '씨네 21'에서도 단순하기 그지 없으면서도 웃기기 짝이 없는 '멜로영화 논쟁'이란 걸 실었었더랬다.

이들 언론들의 얘기를 가만히 들어볼작시면 우리 나라 영화의 모든 문제는 멜로영화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장르가 천편일률적으로 단조로와지면 영화계가 망한단다.

물론 장르가 획일화 되는것이 바람직한 일 일수야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들 눈에는 다 똑같아 보일지 모르는 장르영화 안에서도 분명히 옥석은 있으며, 지금 언론이 해야 할 일은 그러한 옥석을 가려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소위 '작가'라며 칭송해 마지 않는 거장들은, 그러한 상업 영화의 장르의 규칙 속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드러낸 감독들이 아니었던가.

언론에서 뻑 하면 주워 섬기는 '작가'라는 말이 까이에 뒤 씨네마의 젊은 평론가들에 의해서 생겨나고, 확립됐다는 건 여러분들께서도 잘 알고 계신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작가'를 발견한 곳은 바로 헐리우드의 장르영화라는 쓰레기 더미(그들 이전의 평론가들의 생각)였다는 것도 잘 알고 계실 것이다.

장르 영화에서도 '작가'는 찾을 수 있다. 아니, '작가'는 장르영화에서 발견됐다.

우리나라 언론이 남녀가 사랑하는 얘기만 들어갔다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찍어버리는 낙인인 그 '멜로'라는 장르(이것도 제대로 된 개념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치고)에서도 물론 '작가'는 나올 수 있다.

아니, 작가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좋다. 적어도 우리는 그들이 '멜로'라고 싸잡아 뭉뚱그려 놓은 영화들 안에서 얼마든지 옥석을 가려낼 수 있다. 그리고 이 옥과 돌의 차별성을 부각시켜 주는 것이 언론이 해야 할 중요한 역할 중 하나라는 건 이미 앞에서도 얘기했다.

하지만 많은 언론의 논조를 가만 보면 자기가 세워놓은 논리에 현실을 꿰 맞추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나마 심지 곧게 밀고 나가지도 못하고 관객들의 눈치를 열심히 살핀다.

<쉬리>가 처음 개봉됐을때 언론에서 이구동성으로 얘기한 건 '장르 획일화에 일침을 가했다'였다. 다른 점들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 영화가 컷의 기본을 지키고 있건 말건 말이다.

<미술관 옆 동물원>이 처음 언론의 홀대를 받은 것도 그들의 '멜로' 장르에 포함되었기 때문이었다. '씨네 21'은 자신들이 대단찮게 생각하던 이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자 한 주만에 부랴부랴 감독 인터뷰를 하는 얍실함을 보이기도 했다.

일견 한국영화의 미래를 무진장 걱정하는 듯한 이들의 논조는 좀 심하게 말하면 '말장난' - 전혀 객관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않은 자의적인 분류에 자의적으로 영화들 을 몰아넣고 그것들끼리 닭싸움을 시키는 것. 그나마 별로 공정하지도 않게 - 이며, 좀 유하게 말하면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리는' 어리석음에 다름이 아니다.

장르가 획일화보다 더 심각한 것은, 영화의 기본도 제대로 못 갖춘 한국영화들이 버젓이 극장에 걸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작품은 고사하고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심각한 건 언론들이 이런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슬슬 관객 눈치만 보면서 말이다.

정작 언론이 해야할 일은 우리나라 상업영화가 탄탄한 기초 토대부터 갖추도
록 조언하고 비판하는 일일 것이다. 그게 뭔지 모른다면 자신부터 영화의 기본을 공부해야 할 일이다.

그래야 어디 내놓기도 쪽팔리는, 기본도 제대로 못 갖춘 영화에 '치밀하다'는 둥의 헛소리는 안하게 될테니까 말이다.

1999 3.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