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mm (Eight Millimeter)>를 보고 나서
"왜,
도대체 왜 그 소녀를 죽인거지?"
"왜냐고?
우린 그럴 능력이 있었거든. 그게 전부야."
-
<8mm>의 대사 중에서
다이어 스트레이츠Dire Straits의 'Private Investigations'라는
곡을 아시는지.
지금은 영화음악 작곡에 더 힘을 쏟고 있는 리더 마크 노플러Mark Knofler. 82년 발표된 이
곡은,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서 <왝 더 독>까지, 그가 작곡한 영화
음악들보다도 훨씬 영화음악같은, 아니 그 자체가 한 편의 영화인 그런 곡이다.
쓸쓸한 피아노의 아르페지오, 그 위에 깔리는 마크 노플러의 뿌옇고 낮은 목소리로 독백처럼 흐르는 가사와
기타는 필름 느와르의 빗물에 빛나는 밤거리, 자욱한 담배연기, 중절모를 눌러 쓴 웬지 쓸쓸해보이는 탐정과
그가 해내야만하는 '사적인 수사(private investigation)'의 외로움이다.
이 5분 50초의 그리 길지 않은 곡이 떠올리는 것은 한 편의 지독하게 느와르적인 그런 영화다. 그리고
<말타의 매>풍의 지독한 하드보일드 소설이다.
난데없이 왠 음악 얘기냐면.. 필자는 이 곡을 들을때마다 이 곡이 어떤 영화의
주제 음악으로 쓰이면 가장 어울릴까 이리저리 생각을 해보곤 했는데, 아마도 지금까지 본 영화중에선 이 영화
<8mm>가 가장 이 곡에 맞아 떨어지는 영화
가 아닌가 싶다.
분위기 뿐만이 아니라 가사에서 효과음까지. 처음부터 맞춤으로 나왔다고 하더라도 문제없이 믿었을 정도로
둘은 닮아있다.
Private
Investigations
It's a mystery to me
- The game commences
For the usual fee - Plus expenses
아직도 머리속 깊숙히 후덥지근한 여름의 짜증나는 끈적함으로 남아있는 <폴링다운>의 오프닝은
필자가 개인적으로 뽑아본 '오프닝 걸작 베스트 10'의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런 오프닝을 만든 디자이너
출신 감독의 영화답게 <8mm>의 오프닝 또한 인상적이다.
푸른 담배연기를 더 창백하게 보이게하는 8mm 영사기의 빛. 그 뒤에 니콜라스 케이지(탐 웰즈 역)의
잔뜩 찌푸린 얼굴이 있고, 카메라는 푸른 빛으로 흠뻑 젖은 영사기의 몸을 훑는다. <블루스틸>의
카메라가 권총을 훑듯, <모 베터 블루스>의 카메라가 트럼펫을 훑듯.
그 다음은 탐 웰즈가 그 스너프 필름snuff film을 보게된 사연.
별볼일 없는 사설탐정인 그는 아내인 에이미(캐더린 카터 분) 사이의 딸과 오손도손 평화롭게 지내던 집에서
한 의뢰인의 전화를 받는다. 떼부자인 의뢰인 할머니는 죽은 남편의 금고에 있던 스너프 필름의 주인공이자
피해자 소녀에 대해 알아봐달라고 부탁하고, 이건 탐 웰즈에게는 '거물급 탐정'이 되기 위한 끈이다.
Confidetial information
- It's in a diary
This is my investigation - It's not a public inquiry
단서는 8mm 스너프 필름이 전부.
이 단서 하나에 매달려서 수사를 하는 탐 웰즈의 모습이 <블레이드 러너>풍의, 아마도 미국인들이
'엑조틱'하다고 할 음악위로 군더더기 없이, 솜씨좋게, 빠르게 압축되어 있다. 로우 키 조명과 잘 짜여진
화면이 긴박하게 편집되어 만들어진 이런 장면은, 만화같은 배트맨 시리즈 두 편 만들고 난 뒤에도 조엘 슈마허의
예리한 재능이 여전히 무뎌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수만명 중에서 한 소녀를 찾는 그 지루한 수사과정을 지루하지 않게 보여주는 이런 흔치않은 솜씨 덕분에
<8mm>에는 다른 '액션 영화'들에서는 보기 힘든 리얼리티가 배어들 수 있었다.
소녀가 누군지를 알아낸 뒤에도 탐 웰즈의 수사는 계속된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달라지는 점이 하나있다.
여기서부터 탐 웰즈의 개인적인 감정이 수사에 개입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소녀의 엄마를 만나고, 그녀의 방을 들여다보고, 그녀가 숨겨둔 일기장을 발견하는 동안 소녀는 점점 '사건'
이상의 의미가 되어간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설득력있게 다가설 수 있는가를 결정짓는
중요한 열쇠다.
이 가출소녀와 그녀의 엄마를 통해 던져지는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문제는 탐
웰즈의 수사(investigation)가 개인적인(private) 것이 되어가는 가장 큰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이 영화의 핵심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I go checking out the
reports - Digging up the dirt
You get to meet all sorts in this line of work
스타가 되기 위해 헐리우드로 흘러들어간 소녀가 갈 곳은 결국 포르노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은 탐 웰즈.
그가 뒤지는 LA의 뒷골목에는 <블레이드러너>의 싸늘한 음침함과 <택시 드라이버>의
후덥지근한 음침함이 함께 있다.
그곳은 배설을 기다리는 성욕들이 쌓아올린 제국이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바로 그 스너프 필름이 있다.
뒷골목에서 별의별 꼴을 다 보던 웰즈는 한 포르노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맥스(조아퀸 피닉스 분)를
만난다. 눈썹 피어싱, 머리에 뿔난 악마 모양의 머리, 문신같은 쫄티에 영락없는 양아치 스타일임에도 의외로
지적이고 착한 맥스가 마음에 든 웰즈는 그를 가이드 삼아 본격적인 트리플 X(XXX) 탐험에 들어간다.
하지만 결과는 허탕. 별의별 XXX 포르노들을 다 보고도 정작 필요한 스너프 필름은 못만난 웰즈나, 수사의
획기적인 실마리를 기대한 관객이나, 은근히 야한 장면을 기대한 관객이나 허무해지기는 마찬가지.
웰즈의 수사과정이 지난할 과정일꺼라는 건 충분히 짐작이 가는데, 그 허무함에 관 객들까지 동참시킬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뭐, 미국 뒷골목 포르노 가게들 구경하고 싶 었던 관객이 있었다면 만족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것도 모조리 세트라는데..
근데 어떻게 거길 알아냈는지는 아직도 잘 이해가 안되지만, 웰즈는 소녀가 들렸던 청소년 보호소를 찾아가고,
거기에 보관돼 있던 그녀의 짐에서 한 직업소개소의 전화번화를 찾아 낸다. 그리고 웰즈는 진짜 단서를 물게
된다.
Treachery and treason
- There's always an excuse for it
And when I find the reason, I still can't get used to it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이 영화가 준비해 둔 진짜 혼돈의 세계가 시작된다.
웰즈는 "말하자면 포르노계의 짐 자무쉬" 디노 벨벳(피터 스토메어 분)의 비디오에서
필름속 살인자를 찾아내고, 그를 만나러 뉴욕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웰즈가 만난것은 단순한 '범인'들 만은 아니다. 오로지 '그럴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살인을 했다는 범인을 통해 웰즈가, 그리고 관객이 보는 것은 섹스를 통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배설하는 돈의
힘이다(지극히 미셸 푸꼬적인 세계, 그리고 우리에게 이미 낯설지 않은 세계).
웬만한 영화들이면 이쯤에서 '우리편'의 손을 번쩍 치켜들어 줬을 것이다. 나쁜놈은 처절하게 죽고, 악을
응징한 우리편은 살고. 하지만 <8mm>에서도 안락하게 살아오던 한 미국 중산층의 도덕에게 정신분열에
가까운 지독한 갈등을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세븐>에서 그랬던 것처럼 역시나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이름으로 그
살인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Scarred for life - No compensation
Private investigations..
그리고 이미 선을 넘어버린 웰즈는 마지막 잔당, 마스크 속의 살인범을 응징한다.
웰즈가 마스크맨의 집에 잠입한 장면에서 또 한번 조엘 슈마허의 재능이 빛을 발한다. 특히 데스메탈을 뿜던
턴테이블이 튀면서 내는 '툭 - 지익 - 툭'하는 소리로 긴장을 고조시키는 솜씨는 역시나 아무나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웰즈가 맞딱뜨린 마스크맨의 진실은 역시나 현실적이고, 그래서 더 섬뜩하다.
하지만 슈마허는 너무 자신의 의도를 일찍 드러내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숨겨둔 상징들의 의미를 자기 입으로
직접 설명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 같다. '평범한 인간 속에 숨겨져 있는 악마적인 본성'이라는 마스크
맨의 상징은 "왜? 뭘 기대 한거야? 괴물이라도 기대했나?"라는 대사로 너무나 설명적으로
드러난다.
마지막 장면, 그가 응징을 끝내고 나서 아내의 품으로 돌아와 흐느끼면서 "날 구 해줘.."라고
신음하듯 말하는 대사도 마찬가지로 너무 설명적이다.
조엘 슈마허, 배트맨 시리즈를 거치면서 자기 영화의 관객의 수준을 너무 낮춰보는 습관이 밴 것일까? 필자의
생각에 <8mm>는 여백을 좀 더 많이 주었어야 했던 영화였다. 이런 사족같은 설명들이 빠졌더라면
<8mm>는 훨씬 더 좋은 영화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지나친 친절함이라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8mm>는 필자의 머리속
에 정리된 깔끔함 보다는 정리되지 않는 혼란을 남겼다.
<세븐>처럼, 그리고 <폴링다운>처럼 이 영화는 옹호할 것들과 비판할 것들이 뒤섞여
서로를 구별해 낼 수 없게 된 그런 영화였다. 그리고 <8mm>는 두 영화들처럼 우리들의 은밀
한 욕구나 상상을 발가벗긴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혼란을 안길 수 있는 영화다.
소녀의 엄마의 모성을 대신해서 '악'을 응징한 웰즈는 과연 그 응징의 대상을 제대로 선택한 것일까?
모든 것이 '돈'에 의해 소외당한 세상에서 구원은 오직 가족의 사랑밖에 없다는 결론은 믿을 만한 것일까?
웰즈의 응징으로 구원받은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얻은건 무엇이었을까? 이 영화가 얘기하고자 했던 건 진실
의 폭로인가 은폐인가? ...
어쩌면 그 답은 영화 속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 덧붙여서 ]
1.
우리나라에서 조엘 슈마허는 아마도 <배트맨 포에버>, <배트맨과 로
빈>같은 대박 영화들 보다도 <폴링다운>으로 더 유명한 감독일 것이다. 그것도 <폴링다운>이라는
작품의 감독이 아닌 '<폴링다운> 사건'의 '가해자'로서 말이다.
UIP의 직배파동이 시작되면서 영화계 방방곡곡으로 울려퍼지기 시작한 애국가는, 감히(!) 한국인을 노린내나는
수전노에 지지리 발음도 못하는 찐따로 묘사한 <폴링다운>이라는 동네북을 만나 국수주의 행진곡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난뒤 멀쩡하게 극장에서 개봉된 <폴링다운>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서, 2년전 이 영화를 '폴링다운'시켰던 우리야말로 스스로를 '폴링다운' 시킨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추억의 노래 아직도, 그리고 여전히 건재한 것 같다.
2.
맥스 역을 맡은 조아퀸 피닉스는 그 유명한 리버 피닉스의 친동생이다. 근데 별로 안닮은 것 같았더 랬다.
오히려 레이 리오타(<좋은 친구들>, <터뷸런스>..)의 동생에 더 가깝게 느껴졌는데..
필자 혼자만의 생각이었나. 음..
* 위 글에서 인용한 영문은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Private
Investigations' 가사 임.
1999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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