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역(Central Station)>을 보고 나서



"태국에서도 영화 만들어?"

어느날 한 친구에게 <세계영화기행>의 '태국 편'을 봤다고 말했을 때 그 친구가 던진 한 마디다. 우리나라에는 그 배 나온 졸부 아저씨들의 혁혁한 전과로 섹스관광, 보신관광의 나라로 알려져 있는 그 태국에서도 영화는 만들어진다.

<중앙역>은 브라질 영화다. 광란의 리우축제와 축구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브 라질에서도 영화는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브라질의 영화가 우리나라에 수입돼서, 번듯한 개봉관에 걸렸다. 곧장 비디오 샵으로 직행하지 않고 말이다.

이것만해도 사건이라면 사건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그랑프리), 은곰상(여우 주연상), 골든글로브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같은 굵직한 영화상들의 지원사격의 힘이 컸겠지만. 어쩌면 이 수상경력 또한 하나의 사건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빈부격차 심하고, 정치 혼란스럽고, 경제 어렵고, 그래서 축구만 잘하는줄로만 알았던 그 나라에서 만든 영화가 영화상들까지 쓸었단 말야?

어쩌면 지금 어디에선가 이런 대화를 나누고 계신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 뭐 보러갈까?
- <중앙역> 어때?
- 그게 무슨 영환데?
- 이번에 새로 개봉한 브라질 영화 있잖아. 상도 많이 탔다는..
- 브라질에서도 영화 만들어?


'메이드 인 브라질'

S#1. 중앙역 / 군중 / 개인

'메이드 인 브라질' <중앙역>의 출발점은 제목 그대로 리오 데 자네이로의 중앙역인 리오역이다. 그 중앙역에는 사람이 있다. 화면에 빠르게 흔적을 남기고그것을 지우며 어디론가 흘러가는 '군중'과 저마다의 사연과 삶을 가지고 어디론가 향해가려고 하는 '개인'. 그들 사이에 편지를 대필해주며 먹고사는 아줌마도라(페르난다 몬테네그로 분)가 있다.

저마다의 절절한/골때리는/애틋한/기쁜/숭고한 사연을 도라앞에서 고백성사하듯 읊는 사람들과 역을 빠른 속도로 흘러가거나 김밥 옆구리 터지듯 기차에 비어져나온 군중들이 교차되는 이 영화의 도입부는 꽤나 의미심장하다. 그건'사람들'에 대한 이 영화의 입장을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방향없이 흘러가는 군중은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살아가는 개인들의 집합이며,
그 개인들의 삶에는 민중, 대중, 서민 등의 '거대한' 말들이 품을 수 없는 폭넓 은 가치들이 녹아들어 있다. 그리고 그 수만큼이나 많은 개인들의 삶에는 브라 질의 현실이 강요하는 고난과, 그 고난이 강요하는 굶주림이 손톱밑에 낀 페인 트처럼 틀어박혀 있다.

그들은 현실에서 뒤져낸 조그만 희망으로, 현실에서는 좀처럼 찾기 힘든 신의 존재로 삶을 살아간다. <중앙역>이 드러내는 '사람(들)'은 개인, 민중, 대중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모두에 포함되고 있다.

음, 쓸데없이 얘기가 추상적으로 흘렀다. 어쨌든 그 가운데에서 그들의 삶과 희망을 듣고, 적고, 쓰레기통에 폐기처분하는(나쁘게 말하면 그들을 등쳐먹는) 도라가 있다. 그리고 도라의 역 대합실 편지 대필 노점상에 한 소년과 엄마가 나타난다.


S#2. 편지 / TV

멀리있는 아빠에게 보낼 편지를 도라에게 불러주고 역을 떠나던 길에 엄마를 교통사고로 잃은 소년 조슈에(비니시우스 드 올리비라 분). 졸지에 집도 절도 없는 고아신세가 된 조슈에가 잡을만한 지푸라기란 영 사기꾼 같아만 보이는 쪼글쪼글한 편지 아줌마뿐.

도라의 입장에서도 의심과 고집으로 똘똘뭉친 조슈 에가 못 마땅하기는 마찬가지. 그들 사이엔 도라에겐 별볼일 없는 종이조각인, 조슈에에게는 유일한 혈육인 아빠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편지라는 고리가 놓여있다.

결국 도라의 동정심은 조슈에를 자신의 아파트로 데려간다. 그리고 도라의 욕 심은 조슈에를 다시 입양 알선소(사실은 아이들을 죽여 장기를 팔아먹는 곳)로 넘긴다. 그리고 그 돈으로 도라는 고물 TV대신 리모콘이 달린 미끈한 TV를 장만한다.

도라에게 있어 '개인'들의 절절한 사연들을 만날 수 있지만 꼬질꼬질한 현실로 절어있는 밥벌이용 편지들보다는, 그 누구도 만나게 해 주지는 않지만 깔끔하 게 자신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TV가 더 중요하다.

하지만 룸메이트이자 친구 인 이렌느(마릴리아 페라 분)를 통해 입양 안내소의 진실을 전해들은 도라에게 이미 TV가 보여주는 허구는 즐겁지 않다. 그리고 그녀는 조슈에라는 즐겁지 않은 현실을 택한다. 최후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이것은 이 영화의 선택이기도 하다. 영화는 TV같은 미끈한 허구보다는 구겨지고 손 때 묻은 편지같은 현실을 선택하고,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의 아름다움과 힘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한다. 최후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S#3. 길

도라가 조슈에를 입양 알선소에서 탈출시키면서부터 영화는 이들과 함께 '중앙 역'을 떠나, 조슈에의 아빠를 찾기 위해 브라질의 광활한 땅덩어리를 가로지르 는 먼 길을 떠난다. 그리고 이 이상한 '두 친구'의 때론 유머러스하고, 때론 아슬아슬한, 그리고 결국은 따뜻한 여행이 시작된다. <중앙역>의 길은 빔 벤더스 의 영화들에서의 길과 닮은 듯 다르고, 다른 듯 닮아 있다.

벤더스의 길과 마찬가지로 <중앙역>의 길도 그 자체가 과정이자 목적이다. 벤 더스의 여행과 마찬가지로 <중앙역>의 여행 또한 결국 등장인물이 자기 자신을 만나기 위한 여행이다.

하지만 벤더스의 길이 점점 등장인물을 점점 자신의 내면으로 이끈다면, <중앙역>의 길은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점점 밖(타인, 현실 신앙)으로 이끈다. 즉 콘크리트처럼 굳어있는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밖으로 이끄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감독 월터 살레스가 그의 영화스승 빔 벤더스와 긋는 가장 큰 차별성이다.

조슈에와 도라는 <파리, 텍사스>의 트래비스와 헌터 부자처럼 길을 통해서 혈 육(그들의 뿌리)을 찾아나선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처음처럼 사람들과 자연과 신앙을 만난다. 그리고 자신안에 숨어있던 또다른 자신을 마치 처음처럼 만나 게 된다. 그리고 영화는 그런 그들의 여정을 말 그대로 담백하게, 넓게 열린 다큐멘터리같은 시선으로 지켜본다.

여기에는 관객을 잡아끄는 신파조의 눈물짜기나 어설픈 휴머니즘에 대한 강요,
기계적인 민중주의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조슈에와 도라는 친해질 듯 투닥거 리고, 화해할 듯 갈등하고, 서로 상처입히고 그 상처를 다독거린다. 우리 현실 과 너무 닮아있는 이들의 모습은 '만남 ⇒ 긴장 ⇒ 화해 ⇒ 위기 ⇒ 절정 ⇒ 완전 갈등해소(감동의 물결 출렁출렁)' 같은 판에 박힌 공식과는 거리가 멀다.


S#4. 자동차

조슈에의 아빠가 사는 곳으로 향한 버스에 조슈에와 돈을 두고 혼자 내리려다 알거지가 된 도라와 조슈에. 그들은 친절한 트럭 운전사의 차를 얻어탄 덕분에 즐거운 여행을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도라의 노처녀 기질은 트럭 운전사를 떠나 가게 만들고, 그 죄값(?)으로 도라는 자신의 시계를 주고 트럭을 얻어탄다. 신 을 향한 노래를 부르는 브라질의 농부 틈에 섞여 도라와 조슈에는 각자의 아버 지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이 탄 트럭 주위를 브라질의 대자연이 감싸고 있다.


S#5. 자연 / 신앙

그리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광활한 평원. 사막같은 그 평원의 언덕 한가운데 십자가가 서 있다. 마치 우리의 성황당 같은 그 십자가에 도라는 조슈에의 엄마가 남긴 손수건을 걸면서 조슈에의 엄마를 진혼한다. 단순해 보이면서도 그리 쉽게 잊혀지지 않는 이 장면은 '사람에서 자연으로, 자연에서 신앙으로'라는 이 영화의 궤적을 드러내준다.

하지만 영화는 결코 난해한 추상이나 숭고함으로 빠지지 않는다. 그 중심에는 항상 사람이 있다. 신앙의 모습도 그 사람들의 소박한 모습을 통해 드러날 뿐 이다. 이사를 가버린 아버지를 찾아 또다시 길을 떠나는 도중 들리게 된 한 마 을에서 도라는 다시 편지대필을 해주고(이번에는 조슈에와 동업), 그 돈으로 조슈에와 도라는 한 성인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포스터에서 보실 수 있는 바로 그 장면). 그리고 그 돈으로 조슈에는 도라 아줌마를 예쁘게 만들어 줄 원피스를 선물한다. 신께 드리는 편지를 써줘서 번 그 돈으로.

감독 월터 살레스가 세례를 받은 브라질의 영화 운동(또는 운동 영화) 시네마 노보(Cinema Novo)의 대표적인 감독 글라우베르 로샤가 성경에서 찾아낸 "하나님은 지구를 창조했고 인간을 보냈다. 지구는 신의 것도 아니고, 악마의 것도 아니며 인간의 것"이라는 구절의 의미는 이런 식으로 영화속에 녹아들어가 있 다.

인간은 기도하고 신은 축복한다. 브라질 민중의 삶속에서 신앙은 그들위에 서 군림하지 않는다. 희망은 그것을 가진자 위에서 군림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희망'과 '축복'은 사진 두 장, 그리고 원피스 한 장으로 남는다.

그것을 조슈에와 도라에게 선물한 것은 돈이 아닌,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신앙(곧 희망)이다.


S#6. 가족 / 사진 / 편지

결국 조슈에는 온 마을의 집이 모두 똑같게 생긴 '세상의 끝'에서 가족을 만난다. 그 가족은 아버지가 아닌 조슈에의 배다른 형들. 조슈에와 도라는 형들에게 그 사실을 숨기지만 피는 못 속이는 법. 이미 그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 이같기만 하다. 그리고 도라는 자신이 이제 더 이상 조슈에와 있을 수 없음을 직감한다.

조슈에와 엄마를 찾아서 길을 떠나버린 아버지가 남긴 엇갈림 사이에는 아버지
가 보낸 편지 한 통이 놓여있다. 그리고 도라는 모두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삼형제 앞에서 그 편지를 읽는다. 형제는 만나고, 도라와 조슈에는 헤어져야 한다.그들 앞에 조슈에의 아버지와 형들이 찍은 사진이 놓여있다.

다음날 새벽, 조슈에가 선물한 원피스로 노처녀 아줌마에서 '여자'가 된 도라는 조슈에 아버지가 남긴 편지 옆에 조슈에의 엄마가 부쳐달라고 부탁한 그 꾸깃 꾸깃한 편지를 나란히 놓는다. 지금까지 편지들을 쓰레기통에 버리기만 했던 도라는 자신이 받아적은 그 편지 한 통을 직접 배달하기 위해, 그것이 담고 있 었던 사연의 소중함을 확인하기 위해, 그 소중함을 지켜주기 위해 '세상의 끝' 까지 여행한 셈이 된 것이다. 그리고 최후의 자신을 지키기 위해 TV 대신 편지를 택했던 도라의 선택은 한 소년의 인생을 바꾸고, 자신을 구원한 셈이 된 것이다.

세상 끝까지 가서 도라와 조슈에가 발견한 것은 삶의 구원이었던 것이다. 그리
고 그들이 찍었던 성자와의 기념사진은 '희망과 구원으로 맺어진 연대'로 남아
있다. 그들의 눈물이 그저 감상적으로만 보이지 않는 것은 그 '희망'과 '구원' 이 현실에서 출발해서 인간과 자연과 신을 만나고, 다시 그들이 만들어가는 현 실 속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결국 이 영화가 준비해 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조슈에와 도라라 는 '두 친구'의 만남이라기 보다는, 이 두 친구를 통한 '현실'과 '희망과 구원'의 만남이다.


그리고

이 얼핏 단순해 보이는 줄거리 안에 브라질의 광활한 땅덩어리 만큼이나 넓은 의미를 숨겨둔 이 작품 <중앙역>의 힘은 무엇보다도 월터 살레스라는 43살의 젊은 감독의 차분하고 깊은 호흡과 진지함, 그리고 자신의 현실에 대한 따뜻한 애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 치열함은 소년역의 적임자를 찾기 위해 1년이 넘 는 시간동안 1500명이 넘는 지원자들을 오디션하는 열정에서, 그 따뜻한 애정은 촬영 도중 자기 사연을 들려주겠다며 카메라 앞에 선 사람들을 그대로 담아 낸 장면에서, 그 진지함은 끝까지 야단스러운 감상주의에 항복하지 않는 도라 와 조슈에에서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얘기를 오랜 시간동안(2시간 정도 되었
던 것 같은데..) 전혀 지루하지 않게, 오히려 끝나는 시간이 두려워 질 정도로
재미있게 끌어갈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재능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여기에 베를린 영화제, 전미 비평가 위원회, LA 비평가 협회 여우 주연상 같은 상들이 오히려 거추장스럽게까지 보이는 페르난다 몬테네그로(도라 역)의 '다큐멘터리적인' 연기와 감독이 그리도 공을 들여 찾아낸 비니시우스 드 올리비라(조슈에 역)라는 구두닦이 출신 소년의 '몸에 배어있는' 연기의 힘도 거의 맞먹는 비중을 차지한다.

의심과 이기심 속에 숨어 있는 따뜻함, 추함 속에 감춰져 있는 아름다움을 연기해내고 서로 끄집어내는 이들의 연기는 그 인물들 자체가 되어있는 것 같다. 특히 찢어진 소매를 연신 가리면서 리오를 빠져나가는 장면이나 마지막 조슈에를 떠나는 버스 안 장면에서의 몬테네그로의 연기는 필자의 그리 좋지 않은 기억력에도 잊혀지지 않고 남아있다. 구경꾼이나 실제 농부, 상인들이 직접 연기하는 엑스트라들도 이 영화의 또 다른 힘, 리얼리티를 만드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이들 덕분에 영화의 공간이 조슈에와 도라에서 브라질 전체로 확장되었으니까.

또한 잔재주를 부리지 않으면서 광활한 브라질의 하늘과 땅덩어리 땅덩어리, 그 속에 담긴 사람들을 때로는 장엄하게 때로는 황량하게 때로는 푸근하게 담아내는 촬영 원터 카르발로의 솜씨 또한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꽤나 공을 들여 헌팅을 했을꺼라 생각되는, 브라질의 지형지물을 단순하고 아름답게 잡아낸 화면 덕분에 <중앙역>의 리얼리티는 구차함으로 추락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영화를 경험하고 나서 필자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이 하
나 있었다.

'브라질에서 이런 영화를 만들 동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80년대 전쟁하듯 만들고 상영하던 그 투박하고 솔직한 영화들이 갖고 있던 정신 따위는 잊어버리고, 자신의 현실이나 그것을 바라보던 치열함 따위는 잊어버리고, 미끈한 상업영화로 충무로에 정착하려고 애쓰고 있는 과거의 '영화 전사'들에서, 그리고 더 이상 젊지않은 일부 '젊은 신인'들의 '데뷔작'에서 이제는 이런 영화를 기대하기란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변화에 대한 적응이라는 변명으로, 생존을 위한 전략이라는 구실로 미끈한 가짜 헐리우드 영화 만들기에 골몰하고 있는 동안, 지구 반대쪽 브라질에서는 자신의 영화 선배들이 남긴 정신을 이어받은 이런 영화가 만들어 지고 있었다.

모든 영화인이 '전사'이어야 하고, 모든 영화가 '진지'해야 한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하지만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영화를 자신의 얘기를 전달하는 도구로 삼고 영화를 시작했다면, 아무리 상업영화권에서라도 그 출발점은 지켜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얘 기를 한다는 것'과 '상업적으로 성공한다는 것'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그런 것일까.

이 질문에 <중앙역>은 하나의 답을 던지고 있다.

1999. 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