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가리'의 그림은 좋지만 스토리가 문제라는 말도 있다.

"웃기는 얘기다. 할리우드 대작인 '고질라'의 스토리를 봐라. 돌연변이 괴물이 뉴욕에 나타나 싸돌아다니다 알 낳고 죽는거다. 간단하다. 할리우드에도 '스토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없는 영화는 흥행에 실패한다'는 말이 있다."

(99년 4월 23일자 동아일보)

이것은 우리의 신 지식인 1호 심형래씨의 일갈이다. 필자는 물론 新에 해당되지도, 지식인에도 해당되지도 않기 때문에 이 新 지식인의 심오한 일갈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하겠으나,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려보자면, 한마디로 이런 얘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할리우드'처럼 돈만 벌면 되는거지, 왜 그런걸 따지냐?"

그렇다.

우리시대의 신 지식인은 이 시대의 갖은 테크닉을 총동원해 "그림은 좋은", 그리고 "스토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 "부가가치를 높이는 것 "을 영화의 최고의 가치로 삼아야한다는 보편적 진리를 몽매한 구(舊)지식인 또는 안 지식인에게 설파하였다. 아직도 영화의 스토리가 어쩌구, 영화의 구성이 저쩌구 하는 舊리舊리한 얘기나하는 舊 지식인 또는 안 지식인에게.

그러니 지구 반대쪽에 붙은, "할리우드 대작" 비슷한 영화 하나 못 만드는 이상스런 나라에서 세트도 안되고, 음악 더빙도 안되고, '액션'도 안되고, 심지어는 크레딧에 감독 이름을 올려도 안되고.. 등등 이것 저것 다 안된다고 하는, 그야말로 차떼고 포떼고 장기두자는 이상스런 선언을 한 이상스런 감독들은 역시 舊 지식인에 속하는 자들이었던 것이었다.

이들이 '선언'이랍시고 한 이 이상스런 규칙을 "독단(Dogma) 95"라고 명명한 주제파악 하나는 어쩌면 신 지식인의 미덕에 속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마도 우리의 신 지식인은 이 독단의 무리들을 두고 지금 이렇게 한 마디 일갈할지도 모른다.

"웃기는 얘기다."

그런데 그 웃기는 얘기를 하는 구 시대적 감독들중 하나가 그 웃기는 규칙에 맞게 만든 첫번째 영화 <셀레브레이션(Festen)>이 버젓이 서울시내 극장에서 개봉 되었다.

웃기는 일이다.

• 독단적 그림

아마도 가장 많은 분들이 이 영화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점은 아이러니컬 하게도 이 영화의 '테크닉'일 것이다.

도대체 소품들과 세트를 써서 촬영하면 안되고, 반드시 동시녹음만을 하며, 카메라는 반드시 핸드헬드(들고 찍기)여야 하고, 일체의 특수한 조명은 쓰지 않고, 옵티컬(optical effect, 페이드 아웃, 디졸브, 슈퍼 임포우즈 등의 광학 효과)도, 필터도 쓰지 않는 이 영화의 "그림"이 어떻게 나올지 말이다.

물론 이것은 "나는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며 "어떤 탐미주의적인 고려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서약한 감독 토마스 빈터베르크(Thomas Vinterberg)가 의도한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빈터베르크 감독은 그리 걱정을 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관심은 영화의 '미학'같은 것이 아니라, '이런 규칙을 칼같이 지키면서도 영화가 만들어 질 수 있을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영화를 만드는 것은 가능했다. 그리고 "관객을 무시하는 영화"가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작가영화'를 만들지 않겠다는 도그마 95 감독들의 의도와는 반대로 스타일이 너무나 선명한, 우리가 이미 6시간이 넘도록 본 <킹덤>의 스타일을 계속 떠올리게 하는 영화가 나왔다.

하지만 많은 언론들이 얘기하는 이 영화의 독특한 스타일('숨가쁘게 흔들리는 핸드헬드' 등등)같은 것은 역시 이 영화의 중심에 있지 않다.

• 반역의 영화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던 자식들, 친지들, 친구들은 꼬리를 물고 아버지(헬게, 헤닝 모리첸 분)의 '킹덤'에 모여든다. 모여들때부터 자식들은 심상치않다.

장남 크리스찬(울리히 톰슨 분)은 지나치게 말이 없고, 그의 동생 미켈(토마스 보 라센 분)은 지나치게 활달하며 그만큼 상태가 안좋다. 그의 아내 메트(헬레 돌레리스 분)와의 관계 역시 안좋기는 마찬가지. 장녀이자 둘째인 헬렌 (파프리카 스텐 분)은 어딘지 모르게 가족과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 인자한 미소와 벌건 볼의 배 나온, 마치 산타클로스 같은 아버지가 있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불안해 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들은 오랜만에 만난 친지들과 손님들에게 웃으면서 인사를 나누는 '화목한 가족'이다.

자, 우리 모두 이 대목에서 <킹덤>을 떠올려 보자. 이것이 바로 이 영화의 '지상세계'이다. 그리고 <킹덤>의 지하세계처럼, <셀레브레이션> 역시 '지하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지하세계는 지상세계의 비밀을 알고 있다. 그 지하세계란 바로 음식을 만들고, 내어가는 주방! 장남 크리스찬을 사랑하는 하녀 피아(트리네 디홀름 분), 어릴적부터 크리스찬과 친구였던 주방장(보얀 헨릭슨 분), 차남 미켈에게 '몸을 버린' 하녀 미셸(테레즈 글란 분) 같은 사람들이 그 지하세계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 두 세계는 '아버지 또는 주인님, 결국은 왕'의 환갑날이라는 전쟁터에서 본격적으로 주도권 싸움에 돌입한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개기고, 동생은 형을 숲속 나무에 묶고, 급기야 아들 중 한 명은 아버지를 패고..

이 한가운데에 있는 '진실'이라는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 크리스찬은 먼저 폭탄을 던진다. 그리고 지하세계의 은밀한 지원사격하에 크리스찬은 지상세계와의 전쟁을 해 나간다.

첫 폭탄이 터진후 영화는 숨돌릴 틈을 주지 않는다. 정말이다. 이건 과장이 아니다. 크리스찬이 던지는 폭탄은 그 어떤 헐리우드산 폭탄보다도 더 강하고, 무섭게 폭발한다.

그리고 그 주위를, <킹덤> 덕분에 이제는 낯익어진 기묘한 유머, 의혹, 반전, 수수께끼가 감싸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이 전쟁 속으로 얽혀 들어간다. 역시 <킹덤> 만큼이나 재미있고 개성있는 캐릭터들이 치루는 이 콩가루 전쟁 속으로.

이 모든 전쟁의 과정, 즉 미묘하고도 때로는 폭발적인 감정의 흐름, 애틋한 사랑과 끈끈한 우정, 격한 폭력, 등골이 서늘한 미스테리, 구역질나는 위선은 모든 기름기를 쪼-옥 뺀 담백한 화법으로, 그리고 어디서 많이 보던 <킹덤> 스타일로 강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겠지만, 정말 재미있게 그려진다. 물론 이 '생일잔치'가 관객을 위해 준비해 둔 것이 '재미'뿐만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서 관객들은 영화가 후반부로 치달으면서 보여주는 '주도권 싸움'의 결과를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야, 언제 사태가 이렇게까지 발전한거지?'

그리고, 이 생각이 들때쯤 다가오는 영화의 결말은 누가 지상세계를 지탱하고 있었으며, 지하세계는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그 곳에는 누가 속했던지를 뚜렷이 보게 된다.

• 각성의 선언

도그마 1호 영화라는 점을 빼고 생각한다면, <셀레브레이션>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것은 이 영화가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권위(또는 파시즘)에 대한 비판으로도, '진실'에 도달하는 어려움에 대한 비유로도, 아니면 '도그마 95'의 도전 그 자체에 대한 은유로도 훌륭하게 기능한다. 그리고 그 이상의 것을 던진다.

물론 이 영화는 절대로 난해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필자가 생각하는 '좋은 영화' 중 하나는 '난해하지 않으면서도, 아니 재미있으면서도 해석의 가능성을 넓게 열어둔 영화'인데 <셀레브레이션>은 거의 이런 영화의 전형에 가깝다. 그리고, 물론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완벽한 영화란 있을 수 없고, 이 점에 대해서는 <셀레브레이션>역시 마찬가지다.

이 영화가 드러내는 가장 큰 한계는, 영화의 스타일이 <브레이킹 더 웨이브>와 <킹덤>에서 라스 폰 트리에가 보여주던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도그마 95 영화를 가지고 스타일 운운한다는 것이 웃기는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토마스 빈터베르크의 고백처럼 이 영화는 "꼭 작가영화 같은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물론 여기에서 '작가'는 토마스 빈터베르크라기 보다는 라스 폰 트리에다.

<셀레브레이션>이 보여주는 이런 한계는 도그마 95가 '벌써' 드러내기 시작한 한계일까, 아니면 '아직' 극복하지 한계일까. 하지만 어쩌면 '도그마 95'가 실현된다/안된다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도그마 95'가 갖는 최고의 가치는 우리가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들이 틀린 것 일수도 있다는 걸,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게 일깨워주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어쨌든 "스토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없는 영화"라는 점이 <셀레브레이션>의 한계는 아니라는 것 하나는 확실하다.

우리의 신 지식인이 신주단지 모시듯 떠받드는 이 '말씀'이 모든 영화가 지켜야 할 금과옥조가 아니라는 점도.

사족

1. <셀레브레이션>의 첫 장면은 이렇다. 『 이글이글 달궈진 들판의 아스팔
트를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이 스크린의 점으로 찍힌다. 외롭고 힘들어 보이지만 막상 가까이에서 본 그는 그리 힘들지도 외롭지도 않은 표정으로 파랗게 맑은 하늘을 바라본다 』 이 첫 장면은 마치 현재 도그마 95의 상황을 비유하는 것 같아 재밌다 .

2. <셀레브레이션>의 수상 경력은 98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98년 뉴욕 비평가협회 최우수외국어영화상, 98년 LA 비평가협회 최우수외국어영화상, 98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후보.

그런데 만약 이들이 토마스 빈터베르크에게 '감독상'을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받았을까, 안 받았을까?

3. 그리고 이 영화는 절대로 배고픈 상태에서 보지마시길. 또, 핸드폰 전원은 꼭 꺼두시길. 진동도 안됩니다. 이 영화는 총 소리도, 폭탄 소리도, 심지어는 음악소리도 없는 영화라는 걸 기억하셔야 한다.

4. 우리의 상황에서 영화 만들기에 '도그마 95' 비슷한 것을 기대하는 건 무리인 것 같고.. 영화 평론가, 기자들이 영화평 쓰기에 대한 이와 비슷한 선언이 있으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아마도 그 선언에는 이런 조항들이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 평을 쓸 대상이 되는 영화는 반드시 극장에서 입장권을 사고 보아야 한다 』
『 극장에서 영화가 개봉되기 전에 먼저 글을 공개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
『 영화평에서 인용하는 글은 일반 관객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매체에 실린
글이어야 한다. 즉, 보도자료 등의 인용이나 베끼기는 허용되지 않는다.』
『 전문적인 영화용어는 반드시 각주 등의 형태로 해설되어야 한다 』
『 글쓴이의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
『 (인터넷의 경우) 글의 조회수를 공개하지 않는다 』

또 뭐가 있을까...

1999. 4.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