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쉬리>가 나왔을 당시와는 사뭇 달리, 우리나라 관객들이 이제는 '우리도 이런거 할 수 있다!'에 무턱대고 감동먹어 주지 않는다는 점

2. 오히려, 그와 반대로 영화를 보는 안목이 높아져서, 제 아무리 떼돈을 들여서 비주얼을 삐까뻔쩍하게 포장한다한들 영화 자체가 지루하면 차갑게 패대기 친다는 점

3. 그리고 그렇게 안목을 끌어올린 장본인이 떼돈들인 미제 무비들이 아닌, 잘 만들어진 한국 영화들이었다는 점

4. 고로, 이젠 한국영화라고해서 그림만 그럴듯하면 각종 다 접어주고 최선을 다 해 재밌게 봐주지는 않는다는 점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태극기 휘날리며>는 <쉬리> 시절부터 강제규표 영화가 끌어안고 있었던 각종 문제점들을 빠짐없이 그대로 다시 리바이벌 하고 있다.

개성은 없고 역할만 있는 등장인물들 :

무슨 <안따라하면 큰일나는 매뉴얼>같은거라도 있는지, 그닥 참신하지도 않은 구닥 헐리우드 풍의 역할 설정이 이번에도 역시나 반복된다.

<쉬리>와 매치시켜 생각해 본다면 장동건 김윤진, 원빈 한석규, 공형진 송강호.. 뭐 이렇게 되겠다.

인물과 상황에 거의 관계없이, 시종일관 죽어라 힘만 주는 연기패턴 :

역할별로 보면 주인공/조연/엑스트라의 세가지 버전으로, 상황별로 보면 힘주어 역설하기(80%)/각잡기(15%)/잔잔대사 치기(5%)의 세가지 버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 바, 총 9가지의 조합이 가능하다.

물론 이건 배우들 문제라기보다는, 감독의 문제다. 배우들이 문제였다면, 주연급부터 엑스트라급까지 그 정도로 총화단결하여 일관된 컨셉을 유지할수야 없었겠지.

그 등장인물들이 만들어내는, 보험회사 카렌다 사진만큼이나 진부한 각종 설정들 :

의좋은 형제는 등장과 함께 항상 밝고 맑고 명랑한 웃음을 대동한 채, 복잡한 길거리 어우러져 뛰어댕기기를 해야만 한다. 그러면서 가끔씩 서로에게 가벼운 잽도 던져야 한다.

평화로왔던 시절은, 아이들과 함께 냇가에서 물장구치며 놀기로 형상화해야한다. 물론, 이 대목은 반드시 슬로우 모션으로 보여줘야한다.

주인공의 일장 연설에 필 먹어서 적진 기습작전에 자원하는 부대원들은, 반드시 파도타기 필로 한명한명씩 벌떡벌떡 일어나 부동자세와 함께 "저도 가겠습니다!"를 용감무쌍히 외쳐줘야 한다.

민족간에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동족상잔의 비극은, 인민군복을 입은 형과 국방군복을 입은 동생의 장기간 격투 액션 장면으로 형상화 하여야만 한다.

그 외 다수.

특유의 국어책 낭독形 대사 :

이의 예는, 영화에서 발사된 총알 만큼이나 많이 난무한다만, 몇가지만 적어보겠다. 강조 부분에 특히 주목해주시기 바란다.

(학도병을 징집하는 헌병) "십팔세에서 삼십세 사이의 남자는 어서 나와주세요." "자넨 몇살인가?" "너, 앞으로 나가게."

(원빈이 장동건에게) "스스로 지원해서 나갔잖아.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나에게 약속해."

(장교가 장동건 총에 태극기 달아주며) "이 태극기를 백두산 정상에 꽂아주기 바란다!"

(장교가 장동건에게 훈장 달아주며) "축하하네! 결국 해냈어!"

(원빈이 장동건에게 도끼눈을 뜨며 나즈막히) "그 훈장... 도대체 누구를 위한거야...." : 여기에서 '훈장' 부분은 반드시 '훈즈앙'으로 발음해 줄 것

(장동건과 엑스트라) "거기 서!" "쏠테면 쏴보시지..."

특히, 주제의식을 완전히 밑줄까지 그어감서 요약정리 해주는 공형진의 참고서的 대사가 압권이었는데, 그건 아래에서 얘기하겠다.

여튼 그 대사 나올때, 기왕이면 화면에 "주제 요약" 뭐 이런 자막이 점멸했더라면 더 효과가 확실했을 것을.. 아쉬운 순간이었다.

정신없고 내용없고 자금력과 기술력만을 과시하는 전투 장면 :

웬만한 장면이면 예외없이 흔들어대는 격동의 카메라워크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덧 팝콘 대신 키미테를 사갖구 들어가지 않은걸 후회하게 된다.

물론 전쟁 장면의 특수효과나 미술 같은 비주얼은 매우 훌륭했는데, 곁다리치는 얘기지만 필자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강제규 감독은 영화제작사보다도 시각효과 회사를 설립하는게 여러모로 훨씬 나을것 같다는 생각이다.

박격포탄이 우스워지도록 펑펑 튀는 스토리와 편집 :

개그맨 김현철이 진행하는 <1분 논평>을 알고 계시는가. 그 <1분 논평>을 무색케하는 편집도 최소한 두세번은 나온다. 한 이야기 덩어리는 거의 영사기가 고장난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뜬금없이 마무리 되고, 그 마무리는 또 완전 뜬금없는 시작으로 연결된다.

달인 탕약 짜듯 쥐어짜는 눈물 컨셉 :

등장인물들이 죽는게 슬프려면, 일단 관객들이 그 인물에 대해서 알고, 호감을 느끼고, 감정이입을 하고 뭐 그런 과정이 있어야 할텐데, 그런거 없다.

특히, <여명의 눈동자>의 '여옥'하고 비스무리한 역할을 할 줄 알았던 이은주는, 영화 초장에 잠깐 나오고 사라진 뒤, 얼굴 까먹을 때 쯤 돼서 갑자기 다시 등장해서는 10분도 안돼 운명을 달리하고 만다.

원빈이나 장동건 같은 잘생긴 남성들이 우는걸 보고 있노라면 나도 덩달아 따라 울고 싶어진다는 여성이 계시다면, 차라리 그 슬픔은 이해가는 바 크다.

최근 미제 전쟁영화들(<라이언 일병 구하기>, <진주만> 등)의 여기저기서 갖다 쓴 티 팍팍 나는 각종 설정들

곳곳에서 개무시되는 리얼리티

등등등..

아, 이젠 다시 말하기도 귀찮다.

· ·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점에 <태극기..>의 진정한 심각성이 있다.

그나마 <쉬리>는 개봉 당시 본격적이고 나름대로의 기술적인 완성도를 갖춘 액션 장면이 있는 최초의 영화였다는 훌륭한 점도 있었다.

또, 새로운 해석이라던가 생각해볼만한 여지가 있었다던가 하는 건 전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남북 문제라는, 있어보이면서도 다루기 쉽지는 않을 것 같은 문제를 액션스런 영화에 접목시켰다는 참신함이라도 있었다.

헌데, <태극기..>에는 그런것조차 없다.

전쟁 '액션' 장면 찍을때 고생도 엄청하고 돈 또한 엄청 들인 건 언제나처럼 잘 알겠으나,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냐. <라이언 일병>에서 익히 보아온 팔 뎅거덩 날라가고, 피 솟구치고, 총알 사방에 �i�i 꽂히는 그림과 소리만이 공허하게, 그리고 매번 거의 똑같은 패턴으로 지나갈 뿐인데 말이다.

항상 얘기하는거지만, 기본적으로 '액션장면'에도 최소한의 내용이 있어야 하거늘, 그냥 총쏘고 터지고 치고박고 하는 것 외에는 달리 내용이라는 게 없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되고 있었으니 그 아니 지겨워 마지않을쏘냐.

만일 이것이, 전쟁의 지긋지긋함을 몸소 체험케하는 시뮬레이터적 컨셉이었다면 대성공이다.

그리고 그 전쟁장면의 지루함을, 각종 다양한 방법으로 팔다리 날리고 피를 뿜는 잔혹 장면들이, 마치 네덜란드 뚝방 소년먀냥 간신히 틀어막고 있다. 실로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한 부위를 공략하고 있는 그 잔혹 장면들은, 이 영화를 전쟁영화가 아닌 공포영화로 분류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고 있다.

또, 전쟁 장면 도중에 뭔가 주인공들이 '내용'에 해당하는 대사라도 좀 날릴라치면, 걔들을 중심으로하여 최소 반경 약 20미터 정도로 총알도, 폭탄도, 인민군도, 중공군도 모두 피해가는 휴전지대가 순식간에 형성되는 현상 또한 매우 인상깊었더랬다.

과연 그러하다.

주인공들이 대사를 읊는데 어디 총질 포격 등으로 인한 인마살상 따위의 불미스러운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마침내 얘기가 전쟁에 대한 시각이라는 부분에 이르르면 필자는 정말이지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음 모드로 접어들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영화 초반의 공형진이 예의 그 국어책 낭독 필로다 날려주는 대사 "난 사상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그게 형제끼리 총겨눌만큼 중요한건가?"를 통해 요약정리 되었듯, 당 영화가 전쟁에 대해서 하고자 하는 얘기는 단연 초등학교 6.25 글짓기 대회 고학년부 장려상 감이다.

물론, 구국의 영웅 <쉬리>를 쌍수들어 찬양해 마지않던 그 수준을 5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간직한 채, 당 영화에 완전 필 받아서 민족의 비극을 절묘히 형상화했네, 주인공의 실제 인물이 발견됐네 어쩝네 하면서 여전히 밀어주고 빨아주기에 공사다망한 한국 영화 언론의 일관성 또한 완전 개근상 감인 것 또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하긴, 영화 개봉 하기도 전에 이 영화 안보면 완전 큰일날꺼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한 그 엄청난 언론 플레이는, 당 영화의 그 어마어마한 제작비보다도 훨씬 경탄할만한 것이었다 하겠다.

아니다.

그것보다도 훨씬 더 경탄스러운 점은, 그런 대본의 그런 영화에, 그렇게도 많은 제작비를 들이고, 그렇게도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아서, 그걸 보여주는 강제규 감독의 배포다.

필자는 진정 그 엄청난 배포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이제 강제규 감독이, 99년 심형래 감독이 전국적인 규모로 보여주었던 그 화통무쌍함의 대통을 이어받고, 나아가 그것을 뛰어넘을 날도 머지 않은 듯 하다.

· ·

사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분수령은, 영화의 초장에 등장한다.

원빈이 징용열차에 끌려가고, 그 원빈을 구하러 뛰어들어간 장동건도 덩달아 끌려가는 그 장면, 그렇다, 그 장면이 영화 최고의 분수령이었던 것이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열차의 창문을 통해서 서로를 발견한 형제와 어머니, 약혼녀.

그리고 발 밑에 인라인 스케이트 날을 부착한 것이 아닐까 사료되는 부드러운 발놀림으로, 거의 1분 가량 달리는 기차를 추격하며 눈물의 이별을 연출해내던 어머니..

그 어머니를 향하여 기어이 한 팔 가득 뻗어주며 "어머니~~~!!!"를 외쳐대던 형제들..

바로 그 대목에서, 그 형제들이 기냥 열차에서 냅다 뛰어내려서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갔더라면, 수많은 관객들을 도탄에 빠뜨릴 그 �F덩어리적 비극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도 능히 추적해내는 그 기차의 속도로 미루어보아, 거기서 뛰어내려도 기껏해야 팔 부러지는 정도였을텐데 말이다. 아...

그렇다.

형제는 기차에서 뛰어내렸어야만 했다.

그것만이 누군가 한번쯤은 반드시 영화화했을 소재인 한국전쟁을,

하필이면 강제규 감독이 영화화하는 비극을 막을 유일한 기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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