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쉘 위 땐쓰>랑 한 곡 추시겠슴까?

2000. 5.19. 금요일



"내 니덜 귀를 즐겁게 해 줄 얘기 하나 들려 드릴까?"



성당이라고해도 믿을 정도로 천정이 높은 무도회장 꼭대기에 쓰여있는 이 한마디. 영화 인트로 첫 장면에서 보여지는 별거 아닌 이 한마디는 사실 <쒜리 땐쓰(Shall we ダンス, 땐쓰 한 판 쒜리까나)>가 얘기하고 싶었던 모든걸 담고 있다.

왜냐? 이 한마디가 조또 안 엘레강스한 본 기자의 입에서 나왔더라면 주목할 가치 절라없는 흔해빠진 인트로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한마디는 그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에 심상찮은 뜻을 가지게 된다. 

결국 이 말은 '셰익스피어의 그 수많은 걸작들도 사실은 그 시대 사람들한테 재밌는 얘기 한 편 해 주려는 소박한 의도에서부터 시작됐다'는, 바로 그런 속뜻을 가지고 있는 거다. 별루 심상치 않지 않나? 그럼 말구.

우쨌든, 그 셰익스피어의 그 한마디에 이어서 플로어에서 왈츠를 추고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스크린에 넘치도록 들어차고, 그 화면에 "춤과 음악은 인간이 발명한 가장 원초적인 즐거움이다"라는 멘트가 깔리면 이 인트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더욱 확실해진다.

그건 바로 "그것이 무엇이 됐던간에,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시작됐고, 앞으로도 계속 그래야 한다"라는, 어떻게 보면 진부한 얘기다.

그렇다면, 이런 주제를 마빡에 박고 들어가는 이 영화 자체는 관객들을 얼만큼 해피하게 해줄 수 있는지가 오늘의 관건이 될 것이다. 

해서, 본 기자 이제부터 디비기 스텝 한 판 본격적으로 밟아보겠다.


아마도 많은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영환데..'하는 느낌을 받게될 것이다. 당연하다. 

"뻔한 일상에서 멀쩡히 잘 살던 넘이 뭔가 예기치않은 계기로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고, 거기에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게 되고, 우여곡절끝에 결국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도다"

이 영화 <쒜리 땐쓰>가 보여주고있는 이런 스토리 구조는, 잘들 아시다시피 여러 한국영화들, 그 중에서도 대표적으로 <땐쓰 땐쓰>, <반칙왕>등의 영화들이 취했던 설정이었다. 그리고 <쒜리 땐쓰>는 이런 구조의 원조라고 할 수 있겠다. 만들어진 지 4년만에서야 개봉을 하게 됐고, 그 사이 이 영화 저 영화에서 우려먹었기 때문에 이미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영화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물론 뭐 표절시비 이런건 당근 아니고...

우쨌든, 따라서, <쒜리 땐쓰>의 인물 설정 또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설정인 건 당연한 일이다. 

주인공 스기야마(야꾸쇼 고지 분)는 딱딱한 서류만지는 회사의 화이트 칼라인건 <반칙왕>의 임대호, 우연히 보게 된 여인 덕분에 땐쓰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건 <땐쓰 땐쓰>의 주진모, 여주인공 마이 선생(구사까리 다미요 분)이 뭔가 알 수 없는 사연이 있어서 강호의 변방에서 떠돌고 있는건 <반칙왕>의 장관장 또는 <땐쓰 땐쓰>의 황인영.. 

뭐 이런 식으로 맞아 떨어진다는거다.

 <쉘 위 댄스> '스기야마'
<반칙왕> '임대호'
<쉘 위 댄스> 마이와 스기야마
<댄스 댄스> '진아'와 '준영'

이 정도라면, 주인공하구 같이 땐쓰 교습소에서 사교땐쓰를 배우는 강습생들은 사회 부적응 필이 절라 강한 사람들일 것이고, 얘덜은 쫌 티격태격하다가 점점 서로에 대해서 인간적인 애정을 느끼게 될 것이고, 주인공과 그의 사부이신 여주인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은근히 연애질 비시무리한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제 이런 영화는 안봐도 뻔하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건 너무 성급하다.

코메디 영화라고 하기엔 너무 잔잔하고, 잔잔한 영화라고 하기엔 너무 쾌활하고, 그저 명랑쾌활한 영화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이 영화의 가장 큰 강점은, 대부분의 잘 만든 일본영화들이 그렇듯이 특유의 '캐릭터'가 살아있다는 점이다. 

결정적으로,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 외에 다른 조연들의 캐릭터가 수박 겉핥기로 묘사되거나, 주인공의 악세사리 역할이나 하다 끝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조연급들은 주인공의 주변에서 요리조리 얽히고 섥혀가면서 결국 영화전체를 통해 하나하나 빠져선 안 될 존재가 되어간다.

예를들어, 새까만 얼굴에 버섯 스타일의 장정구 빠마를 하고, 있는필 없는 필 다 담아서 온 얼굴에 주름을 잡아, 오바의 극을 달리는 라틴춤을 추는 아자씨 '아오끼(다께나까 나오또분)'를 보자. 

한 번 본 사람이라면 기억이 하지 않을 수 없는 이 노란 샤쓰입은 아자씨를 예고편에서 접했던 본 기자, '아.. <쒜리 땐쓰>는 <주유소 습격사건>류의 일본산 오바무비로구마..'라고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물론 이 아자씨 춤, 오바질의 극을 달린다. 하지만 이 오바, 절라 웃긴다. 그리고 이 오바질은 "그냥" 한 번 웃겨 볼려구 앞뒤없이 낑궈넣은 오바질만은 아니다. 평상시에는 대머리 노총각 회사원이지만, 춤만 추면 완전 인간이 틀려지는, 정열 화르르 타오르는 라틴 땐쓰만 죽어라고 추는 캐릭터. 이런 사람을 만들어내기 위해, 영화속에서마저 "징그럽다"는 사형선고를 받는 '오바땐쓰'라는 작전이 취해진 것이다.

더군다나 영화가 뒤로 흘러갈수록 이 '오바땐써'의 오바는 단순한 오바로만 느껴지지 않고, 그의 끓어올라 넘치는 정열과 분노를 표출하기위한 혼연일체의 자기표현으로 느껴진다. 

오바가 이 정도면 이 또한 예술의 경지가 아니겠는가.


그외의 캐릭터들, 기품있는 목소리와 따스한 배려와 우아한 몸매의 '할머니' 땐써 다마꼬 선생, 오만방자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뚱뚱보 아줌마 땐써 도요꼬, 돗수높은 대문짝만한 안경쓰고 촉새같이 낄데 안 낄데 나서는 중급 초보 땐쓰 수강생 핫또리, <고스트 버스터즈>의 찐빵귀신같이 생긴 소심 지존 땐쓰 수강생 다나까등의 캐릭터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인물로 변신하기 시작한다. 

마치 첫 인상은 별로 안좋은,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진득한 정이 들어버리는 친구를 사귈 때처럼 말이다. 그 애정은 우리가 <바그다드 카페>의 등장인물들에게 느꼈던 것과 많이 닮아있다. 굳이 비교하자는 것은 아니다만, 최근 우리나라 영화들에서 매우 아쉬웠던 부분은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었는가.

어쨌든, 또 하나 부러웠던 것은 배우들의 연기다. 특히 주인공 스기무라 역의 야쿠쇼 고지의 연기는 뭐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겠지만, 역시 훌륭하다. 뭐, 본 기자야 볼룸땐쓰의 세계에 대해서는 조또 모리는 넘이라 잘 모르겠지만두, 영화 후반부 아마추어 땐스 경연대회장에서 야쿠쇼 고지의 춤은 남자인 내가 봐도 눈부시다. 촬영과 편집의 공을 생각하더라도, 그 장면을 연기해내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노력을 쏟아부었을 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주연이야 주연이라서 그렇다고 치더라도, 조연들의 연기 또한 마찬가지 수준으로 훌륭하다. 이렇게 '캐릭터'가 많이 등장하는 영화일수록 계속 등장하는 안되는 조연 한 명이 영화 전체를 말아먹는 경우가 허다한데, <쒜리 땐쓰>에서 그런 말아먹는 조연은 없었다. 물론 일본영화 특유의 오바들은 조금씩 하고 있었지만, 이거야 뭐 배우들의 문제였겠는가.


미국 개봉 당시 포스터

하지만 본 기자가 이 영화에 대해서 정작 부러워 했던 것은, 헐리우드 똥꼬핥기식 흉내를 내면서 대박 한 번 쳐보자는 엄한 생각없이 이런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어내는 내공이었다. 오히려 헐리우드에서 자기네 영화를 리메이크하게 만드는(현재 톰 행크스 주연으로 미라맥스사에서 리메이크 중) 이 내공은, "유행의 똥꼬를 핥다보면 맨날 거기서 거기다"라는 생각으로 영화를 만드는 수오 마사유끼 감독의 사고방식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사료된다.

물론 감독이 이런 내공을 키우기까지는, 감독한테 절라 많은 영향을 미친 일본 영화 지존중의 하나인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오즈 야스지로로 말하면, 일본의 평범한 중산층의 생활과 가족과 세대갈등을 그 특유의 양반다리하고 앉아서 절라 꾸준히 지켜보는 듯한 필로 그려낸 감독이다. 머, 오즈 야스지로 영화야 국내에서 개봉이나 출시된 역사가 없으니 이러쿵 저러쿵 얘기하지는 않으련다. 

하여튼 일본 애덜이 오랜 시간동안 쌓아온 자기네 영화적 전통을 계승해서 새롭게 재발굴한 점을 우리도 꼭 한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감독이 <변태가족 : 형의 색시>라는 그 제목도 야시꾸리한 빠굴무비(일본 전문 용어로는 핑크무비)로 출발해서 여기까지 오게된게 우연은 아닐꺼란 얘기다.

또한, 이 '일본스러운 영화'란게 주리장창 사무라이 영화만 만들어서 생긴건 아니듯이, 한복입고 판소리 나와야 '한국적인' 영화가 만들어지는건 아니라는 점도 꼭 한 번 생각해볼만한 거라고 사료된다. 

<쒸리>가 일본에서 대박쳤다고 한국영화가 아시아 영화의 중심에 섰네, 어쩌네 하면서 절라 호들갑만 떨 일이 아니라, 어떻게하면 우리만의 영화적 전통을 확립해서 세계 어떤 나라에서도 내놓을 수 없는 독창적이고 재밌는 영화들이 나올 환경을 만들까 생각해 볼 문제라는 거다. 그래야 스크린쿼터 문제만 나오면 모가지 터져라 외치는 "문화주권수호"라는 말도 씨알이 먹힐것 아닌가.


음.. 스텝이 좀 삼천포로 꼬여 버렸다. 우쨌던, <쒜리 땐쓰> 얘기로 찍고 돌아가서 마무리 스텝을 밟아 보도록하자.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결국 땐쓰를 쒜리면서 얻은것은 결국 무엇인가? 그렇다. 그것은 '우리는 왜, 뭣 땜에 춤을 추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리고 그 답은, 아주 간단하다만 우리가 똥꼬털 흩날리는 속도로 정신없이 살면서 쉽게 잊어버리고마는 명제, '행복해지기 위해서'이다. 

이 영화는 충분히 그런 얘기를 할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 영화다. 영화속의 주인공들 뿐만이 아니라, 관객들도 함께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소박한 답을 얻도록 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영화 그 자체로 관객들을 충분히 행복하게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는, 다시금 인트로의 무도회장으로 돌아가 그 천정위에 새겨진 셰익스피어의 한 마디를 가뿐히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내 니덜 귀를 즐겁게 해 줄 얘기 하나 들려드릴까?" 

- 딴지 말초 영화부장 한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