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해피엔드>가 해피하게 엔드하는지 알려주마

1999.12.10

전도연

<해피엔드>.

전작 <내 마음의 풍금>에서 거의 스턴트에 가깝다고 할 '60년대의 17살짜리 깡촌 초등학생' 역을 소화해 낸 전도연이, 느닷없이 훌러덩훌러덩 섹스씬을 찍었다는 이유로 동네방네 주목을 끌고 있는 영화다.

아니나 다를까. 빠구리 껀에 관해서라면 똥파리 못지않은 저돌성과 바퀴벌레 못지않은 집요함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한국의 영화언론들이 이런 호재를 가만 냅둘리 없어서, 급기야 전도연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일체의 인터뷰를 거부하기에 이르른다(12월 10일자 <오늘의 운동('스뽀추 투데이'라고도 불리운다)> "전도연의 인터뷰 별 따기"라는 내용의 기자방담 기사 참고).

전도연의 "올 누드 정사 연기"의 "배경"까지 묻는 기사마저 접한 본 기자이지만, 예전의 <폴라 X>에 대한 기사에서 우리나라 영화언론의 '빠구리 증폭현상'을 이미 언급한 바 있고도 해서, 새삼 신기하다 한다거나 분노하거나 그러지는 않으련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본기자 당분간 인터뷰를 피하려는 전도연의 심정에도, 충분히 공감을 느끼는 바이다. 멀쩡한 배우도 순식간에 뽀르노 배우로 변신시킬 수 있는 엄청난 창작력과 재해석 능력으로 완전군장 갖추고 뎀비는 한국 영화언론의 앞에서, 전도연이라고 뽀르노 배우로 다시 태어나지 말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안다, 그 심정.

감독

하지만 여기서 짜증이 다시 한 번 용솟음침은 어찌할 수 없다.

그건, '전도연이 홀딱벗고 <거짓부렁>에 필적하는 강도로 섹스 장면을 찍었더라' 덕분에, 이 영화에서 이보다 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점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다름아닌, 이 영화가 독립영화 제작집단인 "청년" 소속의 무척 재능있는 감독인 정지우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라는 점이다.

16mm 흑백 화면, 2명밖에 안되는 등장인물, 몇 개 안되는 컷, 바람부는 소리와 "800원, 사흘만에 끼니를 때웠다"라는 단 한마디. 이것들만을 가지고 '인간'과 '생존한다는 것'에 대한 심상찮은 깊이의 얘기를 들려줬던 그의 첫 단편 <사로(斜路)>. 

본기자가 이 4분 30초 짜리 영화에 충격 먹었던 건, 이 영화가 수립(?)한 '총 소요 제작비 30만원'이라는 진기록 때문만은 분명 아니었다.

그리고 '서울단편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예술공헌상을 수상함으로써 그의 이름을 결정적으로 세상에 알린 <생강>(비됴로 나와 있다). 가난한 노동운동가의 고단한 아내의 일상을 그대로 삽으로 떠서 필름에 옮긴 듯한 이 영화에서 그는 <사로>의 내공이 한때의 반짝 아이디어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음.. 서론이 길었다. 이렇게 좀 거하다 싶은 서론을 늘어놓은 이유는 <해피엔드>가 전반부는 <생강>을, 후반부는 <사로>를 얼마간 닮아 있기 때문이다.

방식

같은 모양의 기둥과 창문이 반복되는 창백한 흰색의 복도. 얕은 심도로 촬영된 텅빈 복도는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 끝에서 '불륜에 빠진 여자' 최보라(전도연 분)가 나타난다. 싸늘한 복도의 공기에 구둣발 소리만 또박또박 새기며 걷는 그녀의 맞은 편에서 연보라색 원피스 입은 여자가 스쳐 지나간다. 최보라는 원피스 걸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지만, 그녀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사라진다.

이 무채색의 창백한 인트로는, 우리의 '뻔한 일상'이 얼마나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과 위태로운 감정으로 가득차 있는가를 보여준다. 아주 현실적인 꿈의 한 장면에서 퍼온 듯한 '그림'과 '소리'를 가지고.

이것이 이 영화가 취하고 있는 방식이다. 일상의 틈 속에 숨어있다가, 언뜻언뜻 비어져나오는 감정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관계와 내면을 묘사한다. 이것을 위해 영화 속의 세계가 현실만큼이나 현실이고 일상적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다시 말해, <해피엔드>는 우리의 현실과 무척 닮은 세계를 만들어놓고, 거기에서 자신의 등장인물들을 살게 하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일상의 틈에서 얘기거리를 잡아내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그리고 그것을 '남의 일'처럼 담담하게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그런 영화다.

바로 이것이 인트로가 끝나자마자, 몇분 동안 전도연과 주진모가 거의 실제로 섹스를 하는 것 같은 섹스 연기를 해내야 했던 이유이다. 영화 속에 현실을 하나하나 만들어 넣는 작업에서 섹스씬이라고 예외일 수 없는거다. 당연하다.

자, 여기서 전도연이 홀딱 벗고 빠굴씬 찍었네 어쨌네 하는 분들께 하나 물어보자. 너거뜰은 섹스할 때 파카에 코트에 목도리까정 옷 다 갖춰 입구 하냐? 그렇다면 이 기회에 이 기자 아저씨가 알려주겠노라. 섹스는 말이야, 얘덜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옷 홀라당 다 벗고 하구 있단다. 알겠니. 그러니깐 인제부터는 잠바 지퍼에 조찡궈서 피났다구 울지 말구, 기분좋게 홀가분하게 훌러덩 벗구 해두 돼. 알었지?

우쨌거나, 지진아덜 성교육은 이따가 마저하기로 하고, 계속한다.

줄거리

그 격렬한 섹스씬은, 또 한 번 갑작스럽게, 따뜻한 햇볕에 먼지 날리는 헌책방의 나른함으로 연결된다. 거기에서는 "실직한 남편" 서민기(최민식 분)가 주인장(주 현 분)의 꾸사리를 먹어가면서 쭈그려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연애소설에 눈물 찔끔찔끔 흘리면서.

이렇게 이 영화를 끌어가는 세 명의 등장인물들이 등장하고, 얘덜은 '바람난 젊은 여자'와 '그녀의 첫사랑이었던 그녀의 정부', 그리고 '무기력하고 소심한 남편'이 걸어갈 예정된 파탄을 향해 천천히 빠져들어간다.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에서 이미 보셨다시피, 이런 관계에서는 언 넘(또는 뇬)이 하나 죽어 나가기 마련이다. 이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즉, 줄거리로 따지자면 이 영화는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는 영화라는 거다. 요즘 한 번쯤 나오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은 반전 같은 것도 하나 없다.

아내가 바람난 걸 알게 되고,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절망하고, 급기야는 아내를 죽이게 되는 남자. 이런 거 그 옛날 80년대 에로영화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전통적 소재가 아니던가.

영화적 묘미

하지만, 이런 '줄거리'가 이 영화를 진부하게 만드는 요소는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어떻게 하면 함 신기하구 놀래 자빠라질 얘기 함 만들어볼까'만을 밤낮으로 고민하다 오바에 오바를 거듭하고 있는 지금 영화판의 분위기로 미루어 본다면 훨씬 더 특별하고, 훨씬 더 신선하다.

특히 야구 연습장에서 방망이질을 한다던가 TV를 본다던가 앨범에서 옛날 사진을 본다던가 하는 아무 뜻 없이 흘려버릴 일들과 물 끓는 주전자, 자동차 바닥시트, 칫솔같은 사소한 물건들을 가지고 등장인물의 심리상태와 그들의 관계를 동시에 표현해내는 '중의법'을 구사하는 솜씨는 감탄할 만한 것이다.

영화는 이런 소품을 이용한 중의법 뿐이 아닌, 대사를 이용한 중의법, 소품(열쇠, 사진 등)을 이용한 중의법을 씨줄 날줄로 엮어가면서 이들의 복잡한 감정들을 능란하게 풀어나간다. 특히 콩나물국을 먹으면서 최보라가 내뱉는 "아, 시원하다"를 인생살이가 시원하다는 얘기로 받아들이면서 "시원해..? 시원하다구...?"라고 곱씹는 서민기 독백같은 의미심장한 대사들은, 일상에 대한 치밀한 관찰 없이는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 중의법에 필적하는 또 하나의 절묘함은 '생략의 묘'다. 이건 물론 관객들을 헷갈리게만 만드는 <텔 미 썸딩> 류의 그런 생략은 아니다. 보통 영화같으면 한 5분 동안 질질끌면서 보여줄 법한 내용도 고스란히 관객의 상상의 몫으로 남는다.

이 영화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서민기가 자기집에 아내와 김일범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야 마는 장면에서조차, 서민기가 문을 열고 무엇을 봤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원래 보이지 않고 말해지지 않은 것이 더 무섭고 강렬한 법이라는 걸 이 영화는 잘 알고 있다.

이런 식의 영화적 표현이야말로, 어디서고 볼 수 있는 흔해빠진 '치정 살인극'을 마치 처음보는 얘기처럼 풀어낸 요소다. 즉, <해피엔드>는, 영화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줄거리/소재'보다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이라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주고 있다.

주연 배우

여기에 덧붙여, 무척 사실적이면서도 오바하지 않는 함축적인 대사와 콩나물 씹는 소리같은 일상생활의 구석구석을 잡아내는 사운드, 그리고 적재적소에 정확한 타이밍으로 사용되는 음악 또한 이 영화에 섬��한 '현실성'과, 절묘한 '영화적 표현'를 동시에 얻게하는 요소로서 빼놓을 수 없다.

또한 원형광장을 중심으로 빼곡히 들어서 있는 신도시 아파트의 복도, 엘리베이터, 베란다 창문, 버스 등의 지형지물을 절묘하게 활용한 화면구성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구.

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배우들의 섬세하고도 힘있는 연기다. 특히 전도연과 최민식의 훌륭한 연기가 없었더라면 이 영화는 아마도 거의 불가능했거나, 적어도 무척 다른 것이 되었을 것이다.

최민식은 <쉬리>의 후까시 충만한 특수부대 장교역과는 정반대쪽에 있는, 무기력하고도 소심한 실직가장 역을 너무도 실감나게 해내고 있다. 솔직히 본 기자, 이 영화 보면서 내내 '어우, 저런 상황에 놓이면 나라도 돌겠다..'싶은 깝깝함을 느꼈는데, 이건 거의 78% 최민식의 연기의 힘이다.

　

또한 위에서도 잠깐 얘기했지만두, 감정을 흐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는 전도연의 섬세한 연기는 칭찬이 아깝지 않다. 전도연의 연기는 최민식의 연기와 쌍벽을 이룰 만큼 충분한 내공을 보여주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한 번, 전도연

하지만 연기보다도 더 칭찬하고 싶은 것은 영화에 임하는 그녀의 진지하고도 헌신적인 자세다. 17살 초등학생에서 애 딸린 젊은 아줌마로 뛰어넘는 연기 변신 폭도 그렇거니와, 주로 신인 감독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모험'에 가까운 새로운 시도를 계속하는 것 또한 '이슬만 먹어요' 이미지만 가지고 먹고 사는 비슷한 연배의 여배우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프로의 자세다.

더군다나 옷을 월매나 벗어주까나 하는 것이 계약조건에 들어가야만 하고, 섹스에 중독된 여자 역을 맡고서도 섹스장면들을 과감히(이거야말로 정말 과감한 거다) 건너뛰어 버리는 강수욘 같은 '국민 배우'들의 몸사리기만 봐 온 우리에게, 전도연의 전력을 다한 연기는 더욱 가치있게 다가온다. 

영화 언론들이여, 아무리 장사도 좋지만, 정당하게 그리고 열심히 연기하는 연기자까지 '슈퍼 빠굴 워먼'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딴 파렴치한 짓은 제발 그만두자. 격렬한 사랑의 감정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대로 퍼온 듯한 '현실적인' 느낌으로 표현하는 게 그 "대담"하다는 섹스씬의 목표 아녔냔 말이다.

본 기자의 상식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이 영화에서 전도연이 보여준 섹스 연기가 아무리 "대담"하다 한들, 너덜이 평소에 하는 섹스하구 별반 다르지 않을꺼라 사료된다. 아니냐? 그렇담 정말 너덜은 옷 다 낑궈 입구, 소리 하나 안 내고 죽은 듯 섹스하고 있단 말이냐? 그렇다면 지금 즉시 스크롤바 위로 땡겨서 본 기자가 앞에서 일러준 "올 누드 정사"법 읽고, 오늘 집에 가서 함 실행해보기 바란다. 정상적인 어른덜은 다들 그러구 사니깐 너무 부끄러워들 말구. 응?

정치인들 홍보 비됴 찍어주는 등등의 짜증이 용솟음치는 알바로 어렵사리 제작비 마련해서 영화를 만들어 왔던 영화 청년들이 2년 동안 준비해서 만든 장편영화 <해피엔드>가, 훌륭한 영화로서 정당한 평가를 받는 '해피엔딩'을 보여줄 수 있는지 여부는 너덜이 얼마나 정상적인 사람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도 크게 좌우되니깐 말이다.

해피엔드

어쨌든 본 기자, '전도연의 훌러덩 섹스 연기 보고 싶어서'가 되었든, '마누라가 바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나가 궁금해서'가 되었든, 그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이 영화 꼭 한번 보시라고 감히 권해드린다. 뭐, 본 기자도 고삐리 적에 속 시원한 빠굴영화 함 보겠다는 일념하에 <베티 블루>같은 영화 빌렸다가 딸따리는 커녕 감동의 복바침만 경험하고 비됴 돌려준 경험도 있구 하니깐 말이다. <해피엔드>에서 이런 의외의 수확을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작년 이 맘때 <미술관 옆 동물원>을 들고 홀연히 영화판에 등장한 이정향 감독에 이어, 우리는 올해가 엔드하기 전 또 한명의 훌륭한 신인 감독을 만나는 해피함을 맛볼 수 있게 됐다.

덧붙여서

물론 이 영화도 단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중반부에 군더더기가 아닌가 하는 부분이 있어, 다소 쳐지는 감이 없지 않다. 그런 부분을 과감하게 들어냈더라면 훨씬 더 밀도있는 영화가 될 뻔했다.

그리고 이야기 전개에 논리적인 결함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 하나 있다. 서민기는 덜렁 열쇠만 보고서 어떻게 김일범의 오피스텔까지 찾아갈 수 있었는지? 열쇠에 오피스텔 이름과 호수 같은 게 적혀있을 리 만무한데 말이다. 혹 전문털이범이었나..

이 영화에는 세 명의 배우가 우정출연(또는 특별출연)하는데, 그 중 책방 주인장으로 나오는 주현의 시금털털 연기는 이 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의 배우, 배용준과 김혜수는 '비공식적'으로 우정출연 하고 있는데, 얘덜, 자기네들이 이 영화에 출연했다는 사실, 알고나 있을까몰라..   

- 딴지 말초 영화부 부장대우 한동원